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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사묘비(忠烈祠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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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석은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봉안되어 있다. 비석은 정면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건물의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비석의 형태는 길다란 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1660년 이순신의 호국충절을 기려 왕명에 의해 제작, 건립된 이 비석은 임진왜한의 발발 배경, 충무공의 전공과 전략, 묘비를 만들게 된 동기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는데 비문은 모두592字이다.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명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당시 충렬사의 원찰(願刹)이 화방사(花芳寺)였기 때문에, 현종은 이 비와 똑같은 목비(木碑)를 하나 더 제작하여 화방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온갖 수모를 당하다가 1981년 원일모를 화재로 대웅전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997년 민간역사연구단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똑같은 목비2기를 새겨 해군사관학교와 화방사에 각각 기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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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효경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증시(贈諡) 충무(忠武) 이공(李公) 묘비(廟碑)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성균관좨주(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 송시열(宋時烈)은 글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좨주(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송준길(宋浚吉)은 글씨를 쓰다.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세 칸 남짓한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봄과 가을로 제향(祭香)을 올리고 있다. 선종 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기원년(紀元年)에 왜국(倭國)의 괴수(魁首) 풍신수길(豐臣秀吉)이 그 주인인 관백(關白)을 죽이고 나서 거국적(擧國的)으로 우리나라를 침공해 왔다. 공은 그 이전에 북쪽 변경에서 여러 차례 큰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세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신묘년 2월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발탁되자 공은 즉시 무기를 손질시키는 한편 군졸들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왜적(倭賊)과의 싸움이 벌어지자 공은 옥포(玉浦), 노량(露梁), 당포(唐浦), 사량(蛇梁) 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목베었다. 또 당항포(唐項浦)에서도 적선(賊船) 40여 척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모두 극소수의 수군(水軍)으로 대적을 분쇄한 것이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그 공훈(功勳)을 높이 치하(致賀)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동시에 그의 자급(資級)도 올려 주었다. 영등포(永登浦)에서 이르러 왜적을 대파하였고, 또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서는 적을 유인하여 격파하니, 바다가 적의 피로 물들었다. 이어 안골포(安骨浦)에서도 왜선 40여 척을 불살랐으며, 다시 부산(釜山)으로 나아가 적선 1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좌수영(左水營)의 본영(本營)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기고 군량(軍糧)을 비축해가면서 군사들을 재편성하여 다음의 웅장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제수받기에 이르자 적은 더욱 전전긍긍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질시(嫉視)하여 충무공과 그 휘하(麾下)의 장병들이 어리석다고 들고 나선 원균(元均)의 집요하고 간사한 모함이 있었다. 조정의 공론(公論)이 처음에는 양분(兩分)되었다가 어이없게도 원균에게로 기울어져 공은 체포되어 고문(拷問)을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직언(直言)하는 대신(大臣)이 있고 또 임금께서도 그의 무공(武功)을 감안하여 그 책임을 물어 벼슬만 삭탈(削奪)하였다.
바로 그 즈음 모친이 별세하였다. 부고(訃告)를 받고 바삐 친가(親家)로 내려가면서 ‘내 오직 충(忠)과 효(孝)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쳐 왔거늘 어찌하여 이토록 불효막심(不孝莫甚)하게 상(喪)을 당한단 말인가.’라 하며 통곡하니, 같이 가던 군민(君民)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었고 원근(遠近)의 모든 사람들이 매우 한스럽게 생각하여 슬퍼하였다. 한편 통제사로 행세하던 원균이 적군의 계략에 걸려 군사를 전멸(全滅)시키고 자신도 비참하게 피살(被殺)되었다. 그래서 한산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고, 적은 서해(西海)를 덮쳐 하루아침에 남원(南原)까지 진격(進擊)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공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였는데, 공은 10여 명의 기병(騎兵)을 데리고 순천부(順天府)로 달려가서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다시 모았다. 그래서 드디어 난도(蘭島) 벽화정(碧波亭) 싸움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제일 좋은 하사품(下賜品)을 내리고 동시에 공의 벼슬을 더 높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높은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대신 휘하의 장병들에게 포상(襃賞)하였다. 명나라 장수(將帥) 양공 호(楊鎬)는 은색 비단을 보내면서 공을 격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의 공훈은 명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그 용맹은 천하에 떨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즈음 공의 식사나 침소(寢所)는 너무나 간소하고 조촐하였다. 임금께서 특사(特使)를 시켜 보약(補藥)을 하사하시니, 공은 감읍(感泣)하여 눈물로 더욱 충성할 것을 다짐하였다. 임금께서는 공을 염려한 나머지 수군의 세력이 너무 약하므로 보강이 될 때까지 수군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달려와 아뢰기를, “만약 신(臣)이 한번 바다를 떠나게 되면 왜적이 반드시 육지로 올라와 일시에 이 땅을 휩쓸 것입니다.”라고 하며 반대하였다. 이 때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바다와 육지로 와서 모였는데, 공은 기꺼이 그들을 응대하여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얻었다. 공은 통제사의 본영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기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공(公)과 사(私)를 공정하게 하였기 때문에 남쪽 백성들이 물밀 듯이 모여 들었다. 왜장(倭將) 행장(行長)은 빨리 탈출할 길을 열기 위하여 명나라 두 장수들에게 뇌물공세를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은 엄격하고 담백하였다. 행장은 밀사(密使)를 시켜 총포나 칼을 뇌물로 진상(進上)해왔는데, 공은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어 이를 물리쳤으므로 진중(陣中) 군병들은 더욱 용기백배(勇氣百倍)하였다. 행장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사천(泗川)에 주둔해 있던 적들에게 자신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저녁에 큰 유성(流星)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군사들은 이를 몹시 두렵게 생각하였다.
무술년 11월 19일에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게 적탄(敵彈)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이 적에게 포위(包圍)되어 위태로웠는데, 공의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공처럼 독전(督戰)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사이에 행장은 간신히 도망쳤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陣營)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우레 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牙山)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 길에도 끊일 줄 몰랐다. 또 스스로 삼년상(三年喪)을 모시는 사람도 많았고, 승도(僧徒)들은 곳곳에 제단(祭壇)을 모셔놓고 불공(佛供)을 드렸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숨을 살려 주셨던 장군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셨단 말이요.”라 하며 울먹였다.
공은 그 품성이 돈독하고 스스로 정절을 지켰다. 뜻에 옳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비록 높은 벼슬아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義)를 들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여 굴복시켰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조금의 잘못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또 한번 용단(勇斷)을 내리면 어떤 강한 적이라도 이내 순종하게 하였다. 군정(軍政)을 펼 때에는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무고한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희생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삼군(三軍)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대의(大義)를 이루려는 이 마당에 왜적의 밀사를 가까이 하여 뇌물을 받은 자는 그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고, 왜군과 휴전(休戰),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마에 땀이 나게 하였다. 곧 공은 장충헌(張忠獻 장능), 악무목(岳武穆 악비)보다 월등하게 훌륭했으므로 허약한 군졸들을 통솔하여 천하에 제일 강하다는 적과 크고 작게 수십 번을 싸워 이겨낸 공이 있었던 것이다. 동남쪽을 굳게 막아 이 나라 중흥(中興)의 위업(偉業)을 성취하였으며, 거기에 임금의 총애까지 입고 인부(印符)까지 하사받았으니, 이 나라 백성으로서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신주(神主)처럼 모신다 한들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노량은 공의 대장군기(大將軍旗)가 휘날린 곳이며, 소리 높여 군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비록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말은 없으나 공의 그 충성스러운 정혼(精魂)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 위대한 명성은 억만 년이 지난다하여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듯이 성난 바람이 구름을 휘몰아 항상 우리의 강호(江戶)를 노략하던 대마도(對馬島)의 왜적들을 짓밟은 패기에 넘치니, 바로 공의 넋을 엄숙하게 받들어 가장 먼저 모신 곳이 이 곳이다. 옛 사당은 너무나 좁고 낮아서 공의 영위(靈位)를 모시기에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이손(耳孫)인 고(故) 통제사 정익(鄭榏)이 공의 충의(忠義)를 선양(宣揚)하고자 사당을 새로 고치고 큰 돌을 다듬어서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학사(學士) 민정중(閔鼎重)으로 하여금 나에게 부탁으로 공의 공적(功績)을 글로 짓게 하였다.
글의 초록(草綠)이 대충 이루어지자 판서 홍명하(洪命夏)에게 알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 아뢰었다. 드디어 대왕께서도 이 초본(草本)을 을람(乙覽)하시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지금 천상(天上)에 계시며 능백(陵柏)처럼 푸르른 공의 영혼도 반드시 구원(九原)에서 감읍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전말(顚末)을 병기(幷記)해 두는 것은 오직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엎드려 우러러 보건대 우리를 편달(鞭撻)하고 매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공의 휘(諱)는 순신(舜臣)이요, 자(字)는 여해(汝諧)이며,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이다. 숭정(崇禎) 신축년 10월에 금상(今上 순조) 계묘년에 사액(祠額)을 내리셨는데 충열(忠烈)이라는 어필(御筆)이었다. 광영(光榮)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여한(餘恨)이 있겠는가. 입석(立石)을 전후(前後)로 도운 사람은 통제사 박경지(朴敬祉)와 김시성(金是聲)이다. 그해(현종 4, 1663년) 7월에 추각(追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