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1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慈淨國尊)
2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정순대부(正順大夫)
3 밀직사(密直司)
4 좌부대언(左副代言)
5 판선공사사(判繕工寺事)
6 진현관(進賢館)
7 제학(提學)
8 지제교(知製敎)
9 신(臣) 이숙기(李叔琪)
10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봉상대부(奉常大夫)
11 전교(典校)
12 부령(副令) 직보문각(直寶文閣)
13 신(臣) 김원발(全元發)
14은 교지(敎旨)에 의하여 쓰다
신(臣)이 삼가 불교의 경전
15을 상고해 보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가장 큰 목적
16을 입으로 말씀하신 것은 경(經)이라 하고, 마음을 나타낸 것은 선(禪)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禪)은 가히 마음으로 전할 수 있으나, 교(敎)는 구연(口演)하기가 더욱 어렵다. 능히 입으로 강설하여 그 뜻을 연출해서 후학을 계몽하여 계(戒)·정(定)·혜(慧) 내3학(內三學)
17의 도단주(都壇主)
18가 되신 분은 오직 자은국일대사(慈恩國一大師)가 바로 이 분이다.
19
스님의 휘는 자안(子安)이나, 뒤에 현몽(現夢)으로 말미암아 미수(彌授)로 개명하였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선계(先系)는 일선군(一善郡)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한제(漢磾)
20이니 봉순대부(奉順大夫)
21 전객령(典客令)
22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니 공진(公進)
23의 딸로 화주군(和義郡)
24부인(夫人)에 추봉되었다. 출생한 후
25 며칠만에 어머니가 돌아갔으므로
26 자씨(姊氏)
27의 손에 의해서 자라났다. 9살 때 스승에게 나아가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한 번만 들으면 문득 외웠으며 총명하고 민첩한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13살 적에 선산(善山) 원흥사(元興寺
28) 종연(宗然)
29스님을 찾아가 그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다음 경론(經論)을 수학하였다. 19살 때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상품과(上品科)에 합격하고 양주 국녕사(國寧寺)
30에 주석하였다. 29살 적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고, 주로 유식론종지(唯識論宗旨)를 강설하였다. 기사(耆師)
31와 석덕(碩德)들이 모두 스님 앞에 경(經)을 펴고 배웠으므로, 희대(稀代)의 뛰어난 학자라고 칭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미령(弱齡)
32의 나이에 이미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종승(宗乘)
33을 어깨에 짊어져서
34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삼중대사(三重大師)로서 주법(主法)한 적이 이전에는 없었는데 스님이 바로 그렇게 되신 분이다.
두 번째로 주석한 웅신사(熊神寺)
35에 있을 적에는 특별히 비서(批署)를 내려 수좌(首座)로 추대하였고, 세 번째로 장의사(莊義寺)
36에 주석하면서는 또 승통직(僧統職)을 받았다. 네 번째로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주석하다가 전하(殿下)에 나아가 하산(下山)하도록 윤허를 신청하였다. 이때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
37이 왕의 교지를 전달하였는데,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대종장(大宗匠)
38은 백천만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사오니, 스님께서는 경론(經論)의 장소(章疏)를 지어 길이 세간(世間)에 유통하여 널리 후진을 계몽토록 하소서
39"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스님께서는 왕명을 받은 이후로 항상 손에 경권(經卷)을 놓지 아니하고, 강론(講論)에 여념이 없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삼아 경론에 대한 주해를 찬술한 것이 무려 92권이나 되었다. 다섯 번째로 중흥사(重興寺)
40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다가 태위대왕(太尉大王)
41이 즉조(卽阼)하던 해
42인 무술년(戊戌年)
43 5월에 이르러 왕이 비서(批署)를 내려 석교(釋敎)
44 도승통(都僧統)과 중흥사주지행지원명대사(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로 추대하였다.
여섯 번째로 유가사(瑜伽寺)
45의 주지로 있을 때 충렬왕은 원(元)나라 수도인 연도(燕都)
46에 있었다. 왕은 특히 『다반야경(大般若經)』을 신지(信持)하여 숙위(宿衛)
47하는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밤마다 독송(讀誦)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하(殿下) 일행이 모두『대반야경』을 독송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상국(上國)
48의 한 강주(講主)가 『법화경(法華經)』 신해품(信解品)
49에 난해한 부분을 해석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당시 모든 강사들이 "이는 능히 해석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이 사신을 스님에게로 보내어 이에 대한 주해(註解)와 또 심지관경(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짓도록 청하였다. 스님은 이 신해품 주해와 심지경관(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사신에게 주어 왕에게 봉헌(封獻)하였다. 모든 강사들이 이를 보고 저마다 주장하던 쟁론(爭論)을 그치고 모두 찬미(讚美)하면서 그 희유(稀有)한 탁견(卓見)에 탄복하였을 뿐아니라 임금도 더욱 존숭하였다. 일곱 번째로 다시 장의사(莊義寺)로 이주하였다. 무신년(戊申年)
50 4월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51 개내삼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 대장의사주지(大莊義寺住持) 왕교도승통(五敎都僧統) 광지묘변(廣智妙辯) 불각보명대사(佛覺普明大師)로 법칭(法稱)을 올렸다. 개내함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라는 7자는 보록(寶錄)
52에도 실려 있다. 기유년(己酉年)
53에는 숭교원(崇敎院)
54의 교학(敎學)이 되었고, 계축년(癸丑年)
55에 이르러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양가(兩街)
56 도승통(都僧統) 보리(菩提)
57 살타(薩埵)
58 마가나가(摩訶那伽)
59 국일대사(國一大師) 우세군(祐世君)이라는 법칭(法稱)을 봉증하고 별도로 일품(一品)의 봉록(俸祿)을 드렸다.
갑인년(甲寅年)
60 1월
61에 연경궁(延慶宮)
62에서 백팔만승재(百八萬僧齋)
63를 베푸는 날에 임금께서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라는 직인을 새로 주조하여
64 손수 바쳤다. 을묘년(乙卯年)
65에는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
66 삼학법주(三學法主) 덕혜원증(德慧圓證) 장통현변(藏通玄辯) 국일대사(國一大師)로 책봉하고, 참회부(懺悔府)
67를 설립하고 별도로 은(銀)으로 직인을 만들어 승정(僧政)을 전담 관리하되, 비로소 오교(五敎)
68와 이종(二宗)
69의 사사(寺舍)
70를 관리토록 하였다. 정사년(丁巳年)
71에는 불해징원(佛海澄圓) 홍자광지대도사(弘慈廣智大導師)로 봉하였으며, 무오년(戊午年)
72에는 법가(法駕)
73를 준비하여 대민천사(大旻天寺)
74 강원(講院)으로 맞아들여 법상종(法相宗) 3대가(三大家)의 장소(章疏)
75를 강설하였다. 신유년(辛酉年)
76에는 법주사(法住寺)로써 하산(下山)할 곳으로 삼았다가 다시 동화사(桐華寺)
77로 이주하였다. 갑자년(甲子年)
78에 이르러 오공진각(悟空眞覺) 묘원무애국존(妙圓無礙國尊)으로 책봉하였고, 을축년(乙丑年)
79에는 다시 법주사로 이주하였다가 정묘년(丁卯年)
80 12월 1일 아침
81 서기(書記)를 방장실로 불러 주상(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82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인 김영후(金永煦)
83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晡時)에 이를 무렵
84 조용히 앉아 입적(入寂)하였다. 8일에 이르러 법주사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다비(茶毗)하고 산호전(珊瑚殿)
85 동쪽 모퉁이에 탑을 세웠다. 세수는 88이요, 법랍은 75세였다.
스님의 사람됨은 간결하여 연식(緣飾)함이 없고, 천성(天性)에 의해 진리를 따르며 도를 닦았다. 일상생활은 인시(寅時)의 아침에는 죽공양을 하고, 오시(午時)의 점심공양에는 밥을 먹으며
86, 해가 정오(正午)를 지나면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일체 먹지 아니하였다.
87 중흥사(重興寺)에서 무릇 18년을 주석하는 동안 초청을 받지 아니하고는 한 번도 권세가의 대문을 밟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용궁해장(龍宮海藏)인 내서(內書)에 속하는 경론(經論)을 연구하며
88 번역하여 정통하지 않음이 없으며, 다른 서적(書籍)인 외전(外典)까지도 또한 모두 섭렵하여 강기(强記)
89하였으며 항상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또한 가르치되 권태(倦怠)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항상 후진을 유액(誘掖)
90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 비록 배우지 못한 동몽(童蒙)들이 찾아와서 모서(某書)를 강(講)하고 모서를 논(論)해주기를 청하면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강설하여 주고 열한(烈寒)과 혹서(酷暑)에도 거처(居處)의 불편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사방(四方)으로부터 학인(學人)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스님의 여윤(餘潤)
91을 얻고자 하였다. 일국(一國)
92의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 중 배움에 뜻을 둔 사람으로 스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자가 매우 많았다. 스님의 평생 사업이 대개 이와 같았다.
임금께서 부고(訃告)를 듣고 애도하시면서 관원(官員)을 보내어 사후의 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자정국존(慈淨國尊)이라 하고 탑호를 보명(普明)이라 추증(追贈)하였다. 지금의 임금이신 충혜왕께서 선위(禪位)를 이어받은 원년(元年)
93 8월에 문인(門人)인 자은종(慈恩宗)의 원흥사(元興寺)
94주지(住持) 도승통(都僧統) 대사거현(大師居玄)
95과 기림사(祇林寺)
96주지(住持) 원지대사행영(圓智大師行英)
97과 천신사(天神寺)
98주지(住持) 통현대사충서(通玄大師冲瑞)
99와 현화사(玄化寺)
100주지(住持) 자진원묘(慈眞圓妙)
101 (결락) 등 314인이 스님의 행장자료(行狀資料)를 모아 임금에게 올리고 행적비(行跡碑)
102를 세울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103 신(臣) 숙기(叔琪)가 왕명을 받고 두려워서
104 어찌할 바를 몰라
105 주저하다가
106 마치 높은 데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운월지지(隕越之地)
107를 무릅쓰고, 삼가 손을 씻고
108 향불을 피운 다음 부처님께 배계(拜稽)
109하고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시방세계(十方世界) 법왕(法王)이신 석가출세(釋迦出世)는
우담발화(優曇鉢華)
110 나타나듯 희귀(稀貴)하도다.
마음 등불 높이 들어 밖을 비추고
지혜 거울 갈고 닦아 안을 밝히다. ①
계정혜(戒定慧)인 삼학도(三學道)를 펴고 전하여
임금님을 돕고 도와 성군(聖君)되시다.
75년 수행 끝에 입적(入寂)하시니
자은종(慈恩宗)의 깊은 진리(眞理) 홍포(弘布)하였네!
111 ②
5탁세(五濁世)인 남염부제(南閻浮提)
112 뒤로 돌리고
도솔천궁 내원(內院)
113으로 돌아가시니
문인(門人)들이 산호전(珊瑚殿) 옆 터를 닦아서
백옥탑(白玉塔)을 세우려고 뜻을 모으다. ③
그 유골(遺骨)은 탑(塔) 속에서 보이지 않고
유가(瑜伽)
114종사(宗師) 이름만이 진동(震動)하도다.
소신(小臣)에게 명을 내려 비(碑)를 세우나
이 비문(碑文)은 조잡하여 화조(華藻)가 없네. ④
붓을 잡고 먹을 묻혀
115 글을 지으니
스며드는 두려움을 참고 견디다.
116 ⑤
지정(至正) 2년
117 임오(壬午) 9월 일에 문인(門人)인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로써 자은교관(慈恩敎觀)
을 전(傳)하며, 5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며 중흥사지주(重興寺住持) 겸천신사주지(兼天神寺住持) (결락)
명(明) 국일대사(國一大師) 삼중대사우세군(三重大匡祐世君)인 도탁(道卓)
118과 주지(住持)인 자명진각광교대사(慈明眞覺廣敎大師) 탄기(坦起)
119 등이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