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국존비명(弘眞國尊碑銘) [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대유가(大瑜伽) 동화사(桐華寺)
1 주지(住持)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보자국존(普慈國尊) 증시홍진비명(贈諡弘眞碑銘)과 아울러 그 서문(序文)
봉익대부(奉翊大夫)
2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3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문한학사(文翰學士) 신(臣) 김훤(金晅)
4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
5 문한학사(文翰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 신(臣) 김순(金恂)
6은 교지(敎旨)에 따라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이며 동화사 주지인 심지동해(深智洞解) 오명대사(五明大師) 효정(孝楨)
7은 입비공사(立碑工事)를 맡아 보았다.
스님의 휘는 혜영(惠永)이고, 속성은 강씨(康氏)니,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출신이다. 아버지는 내원승(內園丞)
8에 직한림원(直翰林院)
9을 겸임하였는데, 휘는 자원(子元)
10이다. 어머니는 홍씨(洪氏)니 조산대부(朝散大夫)
11이며 호부시랑(戶部侍郞)
12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인 인연(仁衍)
13의 딸이다. 스님은 무자세(戊子歲)
14에 탄생하였다. 11살 때 충연수좌(冲淵首座)
15의 당하(堂下)를 찾아가서 있다가 남백월사(南白月寺)
16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17살 때 왕륜사(王輪寺)
17 선불장(選佛場)에서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처음으로 흥덕사(興德寺)
18에 머물렀다. 기미세(己未歲)
19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았으며, 을축년(乙丑年)
20에는 좌주(座主)
21에 선출(選出)되었다. 중통(中統) 계해년(癸亥年)
22에 이르러서는 수좌(首座)의 법계를 첨가(添加)받았으며, 지원(至元) 4년
23에는 보은 속리사(俗離寺)로 이주(移住)하였고, 기사년(己巳年)
24에는 승통직(僧統職)에 올랐으며, 중찬(中贊)
25 유경(柳璥)
26이 국사에게 백의예참(白衣禮懺)을 주석해 줄 것을 요청하므로,
27 국사는 여러 경문(經文)을 인용 참고하여 『白衣禮懺解』 1권을 찬술하였는데, 후세에 전하여 귀감
28이 되었다.
갑술년(甲戌年)
29에는 불국사(佛國寺)
30로 옮겨갔으며, 병자년(丙子年)
31에 양산 통도사(通度寺)
32로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몇과를 기도 끝에 얻어서 항상 좌우에 모시고 있었는데, 다시 그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여러 개가 되었다. 수시로 누구나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나누어주어도 또한 그 본래의 수효는 전혀 줄어들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다시 중흥사(重興寺)
33로 이주하였는데, 왕이 경련(京輦)
34으로 초빙하여 개성에서 9년간 주석하고 산중(山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비는 다음과 같은 걸퇴시(乞退詩)를 지어 바쳤다.
35
님을 위해 참고 참아 축리(祝釐)했으니
36
산중(山中)으로 돌아가서 침수(枕漱)하면서
37
해와 달이 원근차별(遠近差別) 없는 것 같이
임하(林下)에서 님을 위해 기도하리다.
38
을유년(乙酉年)
39에는 유가사(瑜伽寺)
40로 옮겼다가, 경인년(庚寅年)
41에 이르러 사경승(寫經僧) 일백명(一百名)
42을 거느리고 대원국(大元國)의 대도(大都)
43에 가서 금자(金字)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하여 선물로 올리자
44 세조황제(世祖皇帝)
45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 노고를 치하하고, 경수사(慶壽寺)
46에 머물게 하였다. 이 때 국사께서 대중 지도를 엄숙히 하여 모범을 보였더니, 모두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어느 날 만안사(萬安寺)
47의 당두(堂頭)
48가 여러 가지 깃발·일산·의장(儀仗)·당(幢)·다라니(陀羅尼) 등으로 도량을 장엄하고, 국사로 하여금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해 주기를 청하였다. 국사께서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법상(法床)에 올라 연설(演說)하시니 그 명쾌함이 마치 현하(懸河)
49의 변재(辯才)와 같았다. 청법한 사부 대중들은 크게 앙모(仰慕)하여 마치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이 기뻐하였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 금니(金泥)로 대장경(大藏經)을 쓰는 사경 불사를 마치니, 세조(世祖)가 크게 가상히 여겨
50 귀하고 소중한 많은 선물을 하사(下賜)하고,
51 사신(使臣)을 보내어 국사의 귀국 길에 동반하여 호송케 하였다. 국사께서 두드러진 아름다움을 대국(大國)
52에 선양하여 이와 같은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국사는 더욱 힘찬 용기를 자신에게서 얻어
53 마치 사공(射工)
54 벌레가 풀잎을 갉아 먹는 것과 같이 일이 순조로웠고,
55 또 항상 마음을 교법(敎法)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이입망전(理入忘筌)
56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57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자 근시(近侍)인 내의(內議)
58직장(直長)
59 민적(閔頔)
60에 명하여 스님을 유가사(瑜伽寺)로 영접하니, 스님께서는 깜짝 놀라 국존 추대를 싫어하여 마음으로 이를 피하여 도망하려 했다. 그러나 왕도 물러서지 않고 연독(緣督)
61에 맞추면서 억지로 추대하려 하였다.
62 10월에 경사(京師)
63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대장군(大將軍) 황원길(黃元吉)
64에게 명하여 내마(內馬)
65를 가지고 천수사(天壽寺)
66로 가서 국존을 숭교사(崇敎寺)
67 별원(別院)으로 영입하고, 22일 국존으로 모시는 책봉식(冊封式)을 거행하였으니, 법호는 보자(普慈)이시다. 그리고 26일 수녕전(壽寧殿)
68에서 임금께서 군신(群臣)들을 거느리고 국존의 직인을 드리는 납배(納拜)의 예를 행하고, 또 이어서 오교도승통직(五敎都僧統職)을 제수(除授)하고, 동화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계사년(癸巳年)
69에 삼전(三殿)
70을 찾아 배알(拜謁)하였더니, 스님을 청하여 성도사(成道寺)
71 주법(主法)
72으로 추대하였다.
지원(至元) 31년
73 1월 19일 스님께서 가벼운 병을 보였다. 회하(會下)에 있는 명덕(明德)
74이라는 스님이 국존에게 병세를 물으니, 국존께서 이르시기를 "다만 음식의 소화가 잘 안될 뿐이다" 라 하였다. 또 대중(大衆)을 상대함이 종용(從容)
75하며 담소(談笑)도 자약(自若)
76하였다. 24일 연시(寅時) 말(末)에 시자(侍者)를 불러 유서(遺書)와 직인을 함께 봉하게 하고, 행이(行李)
77 별감(別監)
78인 최홍단(崔洪旦)
79에게 부탁하여
80 임금님께 전하도록 하고는 단정히 앉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십지품(十地品)
81을 거양(擧揚)한 다음, 조금 있다가
82 조용히 입적하였다. 얼굴 빛과 모양이 선백(鮮白)하여 3일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지(大地)는 눈으로 덮혀 백은색(白銀色)이었다. 2월 2일 용수산(龍首山)
83 남쪽 산기슭에서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수습하고 탑은 동화사(桐華寺)에 세웠다.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56하였다. 이 때 충렬왕은 원(元)나라 세조(世祖)를 만나기 위하여
84 원의 서울인 상도(上都)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국존의 유서(遺書)와 부음(訃音)을 받아 보시고,
85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시호를 홍진(弘眞), 탑호(塔號)를 진응(眞應)이라 추증하였다.
국존께서는 천품(天禀)이 수특(秀特)하여 총명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자비로써 몸을 삼고 긍서(矜恕)
86로써 마음을 삼았을 뿐아니라, 엄격하고 강직하여
87 과묵(寡默)하며
88 피차(彼此)에 대하여 전혀 교만한 마음이 없었고,
89 다만 어디에 있던 후진(後進)에게 강수(講授)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슬프도다! 참으로 일국(一國)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법왕(法王)이시다. 국존께서 평생동안 도덕으로 말미암아 감득(感得)하신 영험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는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는 세세한 말변사(末邊事)에 속하는 것이며,
90 또 보는 사람들이 괴이(怪異)하고 허탄하게 여길까
91 염려되어 이 비문에는 모두 기록해 두지 않는다. 문인(門人)으로 금산사 주지이며 승통(僧統)인 효정(孝楨)
92 등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종(哀悰)
93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깊은 샘
94을 채웠다. 스님의 행장(行狀)을 모아 구달(九闥)
95에 진정하여, 위대한 홍적(鴻迹)
96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귀부(龜趺)
97를 세우도록 허락을 청하였으므로, 임금님께서 소신(小臣)
98에게 명하여 스님의 경행(景行)
99을 돌에 새겨 크게 천양토록 하라 하였으나, 다만 학예(學藝)가 천박하여 스님의 참된 자취
100를 구술(具述)할 능력이 부족함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내리신 조칙(詔勅)을 끝내 사양할 길이 없어서
101 뻔뻔한 얼굴을 무릅쓰고 사실대로 명(銘)하여 이르기를
중생근기(衆生根機) 상중하(上中下)로 차별이 없고
허망하게 분별(分別)하여 생멸(生滅)하나니
각웅(覺雄)께서 이를 위해 출현(出現)하시어
근기(根機)따라 연설하여 제도하도다. ①
권실교(權實敎)와 돈점교(頓漸敎) 등 8교(八敎)를 설(說)해
일법(一法)에서 흘러나와 달라졌도다.
102
자은종(慈恩宗)의 법상종지(法相宗旨) 자씨(慈氏)가 시조(始祖)
103
오묘하온 그 진리(眞理)는 알기 어렵네! ②
최초에는 자씨보살(慈氏菩薩) 전해 주었고
104
무저보살(無著菩薩) 연구하여 골수(骨髓)를 얻고
105
현장사(玄奘師)와 규기(窺基)스님 널리 폈으며
106
우리 나라 동국(東國)까지 전하여 왔네!
107 ③
철인(哲人)들이 상속(相續) 출현(出現) 계승하면서
108
우리 스님 전해받아 팔조(八祖)가 되다.
109
국존(國尊)께선 그 법통(法統)을 이어받아서
110
옛 스님과 비교해도 부끄럼 없네! ④
위대하신 그 도덕(道德)은 천하(天下)에 가득
111
정통(精通)하온 그 학문은 내외
112를 망라(網羅)
중생들을 이익(利益)함이 무궁(無窮)하오며
군신상하(君臣上下) 모든 국민
113 의지하였다. ⑤
인자(仁慈)하신 마음으로 도와주시니
모든 사치(奢侈) 추방하고 진실(眞實)만 갖다.
114
자신에게 엄격하여 겸손하옵고
115
다른 사람 잘못함은 관용(寬容)하도다.
116 ⑥
있는 곳엔 어디든지 불교를 펴니
사방(四方)에서 학자들이 모여들도다.
일거일동(一擧一動) 모든 것이 덕행(德行)뿐이니
모든 사람 구의(摳衣)
117하여 예배하도다. ⑦
국존으로 추대됨은 자의(自意) 아니니
118
임금님은 옳다 해도 자신은 싫어
119
법상종풍(法相宗風) 크게 불어 천양(闡揚)하시니
말세(末世) 중에 영산회상(靈山會上) 재현(再現)함이여! ⑧
수일(數日) 후의 입적(入寂) 시(時)를 미리 알아서
120
종용(從容)하고 자약(自若)하여 온화(溫和)하시니
하늘까지 무심(無心)찮아 참담(慘憺)하오며
삼라만상(森羅萬象) 물색(物色)들도 슬퍼하도다. ⑨
대덕(大德) 2년
12110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