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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각관승통 묘지명(玄化寺 覺觀僧統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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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왕각관(王覺觀, 1121~1174)의 자는 치허(致虛)로 예종(睿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참지정사(叅知政事) 최용(崔湧)의 딸로 예종과 결혼하여 장신궁주(長信宮主)가 되었다가, 인종(仁宗) 14년 숙비(淑妃)에 봉해졌다. 출가하여 승통 덕겸(德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18세에 대선(大選)에 합격하고, 현화사(玄化寺)[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영남면 현화리에 있던 절]를 비롯하여 네 곳의 이름난 가람(伽藍)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승통(僧統)이 되었다. 1174년(명종4) 입적하니, 이듬해 영취산(靈鷲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돌아가신 현화사1 주지(玄化寺 住持) 승통(僧統) 묘지명
스님의 이름은 각관(覺觀)이고, 자는 치허(致虛)이며, 속성은 왕씨(王氏)로, 왕실의 자손이다.2 어머니는 최씨(崔氏)이고,3 예종 15년 신축년4 11월 9일에 탄생하였다. ▨▨ 출가하여 ▨ 승통 덕겸(德謙)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수업하였다. 18세에 대선(大選)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이 날마다 새로워져 무리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21세에 ▨▨▨▨▨, 33세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여러 차례 임금의 은총을 입어 승통(僧統)으로 받들어져서 네 곳의 이름난 가람(伽藍)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승통은 사문(沙門)의 높은 승계로 무릇 궁빈(宮嬪)의 소생은 될 수 없는 것인데, 스님의 도덕이 특별하여 오랫동안 조정과 민간에서 존경하였으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명종 4, 1174) 11월에 병이 들자 보름을 넘겨 그 달 23일 입적하였다. 이듬해 2월 20일 영취산(靈鷲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스님은 젊어서부터 삼보(三寶)를 경영하고 불사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국왕으로부터 조정과 시장 및 산촌의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에 이르기까지 ▨▨ 모두 우러러 받들었다. 스님은 마치 하나의 강물에 달이 만 개 비추인 것 같았고, 또한 텅 빈 구멍에 부는 바람처럼 일일이 응해주니 삼한(三韓)의 복이 되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 하겠는가. ▨ 입적하던 ▨ 날 수풀과 냇물도 슬퍼하며, 도인과 속인도 흐느껴 울었다. 문인 50여 명이 ▨ 모아 ▨▨▨ 세우며, 복을 받기를 바란다.
명(銘)[錄]하여 이른다.
불법이 동국으로 전해져오니 하늘이 우리 스님을 앞장 서 보내어
계율을 지키고 지혜를 닦으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었다.
▨▨를 들어내고 보시하기를 즐겨하니
미물에까지 은혜가 미쳤음은 하늘이 알리라.
산골짜기의 못 속에 감춘 배를 안심했지만
한밤중에 산골짜기의 못까지 지고 갔으니,5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통곡을 참고 슬픔을 거두라.
분묘를 이미 견고하고 편안하게 만들었으니
문하의 제자들을 이롭게 하며 남겨진 복도 가히 볼 만하리로다.
[출전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영남면 현화리에 있던 절. 현종 12년(1021)에 창건되었다. ↩
참지정사(叅知政事) 최용(崔湧)의 딸로 예종(睿宗)과 결혼하여 장신궁주(長信宮主)가 되었다가, 인종(仁宗) 14년 숙비(淑妃)에 봉해지고 명종(明宗) 14년 사망하였다. ↩
예종 15년(1120)은 경자(庚子)년이고, 신축년(辛丑年)은 예종 16년(1121)이다. 그러므로 원문의 ‘예종 15년 신축년’은 착오인 듯하다. ↩
『莊子』「內篇」 ‘大宗師’에 ‘어떤 사람이 해가 저물자 배를 작은 산골짜기에 감추고, 다시 그 산을 연못 속에 옮겨 놓고는, 이젠 아무도 훔쳐가지 못할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한밤중에 어떤 힘센 이가 연못까지 몽땅 짊어지고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작은 물건은 큰 데 감추어도 잃어버릴 수 있지만 , 우주에 매인 것은 우주에 맡기면 잃을 수가 없다는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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