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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단속사 대감국사 탑비(山淸 斷俗寺 大鑑國師 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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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 터에 있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문종 23, 1069~의종 13, 1158)의 비.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기준(機俊)이 써서 문인인 회량(懷亮)과 처단(處端) 등이 새겨 1172년(명종 2)에 세웠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없고 비의 탁본만이 문경 김룡사(金龍寺)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비문은 대감국사가 태어나 어려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과거에 합격하였다가 출가하여 혜소국사의 제자가 되고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다가 승과에 급제하고 여러 사찰의 주지로 활동하였으며 송(宋)의 개심선사(介諶禪師)에게 설법 어구(語句)를 보내 인가서를 받았고 인종이 왕사로 책봉하였으며 말년에 단속사에서 지내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고려국 조계종(曹溪宗) 굴산(崛山) 하(下) 단속사(斷俗寺) 대감국사(大鑑國師)의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수국사(修國史) 겸(兼) 태자대사(太子大師)를 역임하고 치사(致仕)한 신(臣) 이지무(李之茂)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보현사(普賢寺) 주지(住持) 대오(大悟) 중대사(重大師) 신(臣) 기준(機俊)은 칙명(勅命)에 의하여 비문과 제액(題額)을 썼다.
살펴보건대 불법(佛法)이 진단(震旦)에 전래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한(漢)나라 영평(永平) 10년 이후부터 위(魏)·진(晋)·제(齊)·양(梁)대를 지나오면서 세상에서 부도씨(浮圖氏)라고 호칭되는 스님들이 대개는 경(經)과 율(律)에 얽매이고,명상(名相)에 걸려 이른바 교외별전(敎外別傳)한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니,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선지(禪旨)는 진실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가르침이다. 보리달마(菩提達摩)에 이르러 서토(西土)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오는 대의(大衣)와 보발(寶鉢)을 친히 신광(神光)에게 부촉한 후, 바야흐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세상에 전수(傳授)함을 나타냈다. 조사(祖師)와 조사가 서로 전수하여 법등(法燈)과 법등이 꺼지지 아니하고, 점점 동점(東漸)하여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까지 전래되었다. 오직 이 여래(如來)의 대광명장(大光明藏)이 고요하고 넓어 끝이 없으며, 모든 법(法)을 함섭(含攝)하여 능히 커져서는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며, 능히 작아져서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사려(思慮)와 논의(論議)로 능히 미치거나 언어문자(言語文字)로는 능히 표현하지 못하며, 또한 지해(知解)로써도 알지 못할 뿐아니라 지식(知識)으로서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삭가나안(爍迦羅眼)을 갖춘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알 수 있겠는가? 그 최상승을 탐구하여 제일의체(第一義諦)를 터득하고, 중류(衆流)를 가로질러 바로 피안(彼岸)으로 뛰어넘어 시방(十方)이 광장설상(廣長舌相)을 토출하며, 한 모금에 서강(西江)의 물을 모두 들어 마시고, 감로(甘露)의 문을 열어 사자후(獅子吼)를 호령하시니, 참으로 이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인 것이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일으키며 곧바로 부처님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천하(天下) 후세인(後世人)들로 하여금 설사 여러 개의 발을 가졌더라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이라면 어찌 탁연(卓然)하며 기특함이 아니겠는가?
오직 우리 대감국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국사의 소속 종파(宗派)를 상고해 보건대, 스님은 임제(臨濟)의 9대 법손이다. 휘는 탄연(坦然)이요, 속성은 손씨(孫氏)며, 선조(先祖)는 (결락) 양현(陽縣) 사람이다.아버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스님께서는 선천적으로 특이한 기질을 타고 나서 지기(志氣)가 일반 아이들과 달랐다. 나이 겨우 8∼9살 때, 이미 문장을 엮으며 시(詩)를 지을 줄 알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또한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13살 때 이미 6경(六經)을 배워 대충 대의(大義)를 통달하였고, 15살에 명경생(明經生)에 합격되어 명성을 세상에 떨쳤으므로 나이 많은 선비들이 추중(推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 임금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을 때,그의 현명한 소문을 듣고, 궁중(宮中)으로 초빙하여 세자(世子)의 곁에 있으면서 글과 행동(行動)을 가르치되,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게 하였으니, 세자는 곧 후일의 예종(睿宗)이다.
스님은 일찍부터 진로(塵勞)에서 벗어날 뜻이 있어 신세(身世)를 마치 부운(浮雲)처럼 보며, 명리(名利) 버리기를 헌신짝과 같이 하였다. 평소에 사소(師素)와 보현(保玄)인 두 고사(高士)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사안(師安)이 먼저 이미 머리를 깎고 먹물 옷(僧衣)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몰래 궁(宮)을 빠져나와 개경 북쪽에 있는 성거산(聖居山) 안적사(安寂寺)로 가서 사주(寺主)인 주지스님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으니, 그 때 나이 19살이었다. 스님은 평소 선열(禪悅)을 좋아하였으므로 광명사(廣明寺)로 나아가 혜조국사(慧炤國師)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불법(佛法)을 배워서 마침내 심후(心厚)를 전해 받았다. 드디어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원(禪院)에서 정진하였는데 총림의 학자들이 (결락) 모두 비록 출가한 스님이지만, 노모(老母)와 멀리 떨어져 있어 봉양(奉養)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산 밖 동구(洞口)에 자그마한 절을 짓고자주 왕래하면서 봉양하고, 다시는 나다니지 아니하였다.
숙종이 천조(踐祚)하고 스님을 왕도(王都)개경으로 초빙하였으니, 천조(踐祚) 후 10년째였는데, 대요(大遼)의 건통(乾統)4년 갑신(甲申)에 해당된다. 그 후 대선승과(大選僧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그 해에 왕명으로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에 있게 하였다. 예종이 즉위해서는 스님을 더욱 존중하여, 원(元) (결락) 대사(大師). 3년 정해(丁亥)에 개돈사(開頓寺)로 옮겼으며, 4년 무자(戊子)에 이르러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내렸고, 10년 갑오(甲午)에 왕의 특명으로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제수(除授)하고, 이어 법복(法服)도 아울러 하사하였다. 13년 정유(丁酉)에 선암사(禪巖寺)로 옮겼으며, 16년 경자(庚子)에 선사(禪師)의 법계를 첨가하였다. 인왕(仁王) 원년 임인(壬寅)에는 수를 놓아 붙인 금란가사(金爛袈裟)를 특사하였고, 5년 병오(丙午)에 왕명으로 천화사(天和寺)에 주지하였으며, 6년 정미(丁未)에 보리연사(菩提淵寺)로 이주하였다. 7년 술신(戊申) 봄 스님이 임금께 주청하여 소주사찰(所住寺刹)인 보리연사에서 법회를 개최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 산중에는 옛부터 사훼(蛇虺)가 많아서 이 길을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자못 큰 피해를 입혔다. 기도 법회가 끝난 후부터는 이 독사들이 어디론가 모두 사라졌으므로 지금도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스님의 기이한 신통력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결락) 화사(和寺). 이해 가을에임금께서 이 절에 행차하여 스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종용(從容)한 태도로 도(道)를 묻고는 친히 금강자(金剛子)로 만든 염주를 바쳤다. 스님은 즉석에서 게송(偈頌) 일수(一首)를 지어 감사하는 뜻을 표했다. 임금은 이를 보고 그 민묘(敏妙)함을 찬탄하였다. 10년 신해(辛亥)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제가(制加)하고 금란가사도 아울러 하사하였다. 14년 을묘(乙卯)에 보제사(普濟寺)제석원(帝釋院)에 주지하면서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도 겸하였다가, 그 해 9월에 영원사로 옮겼다. 16년 정사(丁巳)에는 조칙으로 말미암아 경궐(京闕)에 나아갔으며, 18년 기미(己未)에 광명사(廣明寺)로 옮겼다. 스님의 덕행과 도덕이 모든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므로 항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왕이 반드시 친필로 편지를 보내어 스님의 자문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더욱 높았다.
일찍이 지었던 4위의송(四威儀頌)과 아울러 상당(上堂)하여 설법한 어구(語句)를 무역상의 배편으로 대송(大宋)의 사명(四明)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있는 개심선사(介諶禪師)에게 보내어 인가(印可)를 청하였다. 개심선사가 극구탄미(極口歎美)한 4백여언(四百餘言)이나 되는 인가서(印可書)를 보내 왔으나, 글이 너무 많아 비문에는 싣지 않는다. 또 도응(道膺),응수(膺壽), 행밀(行密), 계환(戒環), 자앙(慈仰)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당시의 대선백(大禪伯)들이었다. 이 스님들과도 편지로 통하여 친한 도우(道友)가 되었으니, 스스로 도덕이 높지 않으면 어찌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24년 을축에는 임금께서 스님의 도덕을 존숭하여 4월 7일 우부승선(右副承宣)인 이포여(李舖予)로 하여금 편지로 왕사(王師)로 모시려는 뜻을 전달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결락) 다시 지주사(知奏事)인 김영관(金永寬)을 보내 계속하여 왕의 뜻을 전하였으나, 스님은 역시 굳게 사양하였다. 세 번째까지 사양하였으나, 왕의 간청도 마지 아니하였다. 마침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혜성(彗星)이 나타난지 이미 20일이 지났고, 또 날이 가물어서 조야(朝野)가 크게 근심하였다. 5월 6일 비로소 간청하여 왕사로 봉하는 조서를 내렸더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는데, (결락) 이 날에 큰 비가 내렸다. 임금은 크게 기꺼워하면서 덕이 높은 스님을 왕사로 책봉했기 때문이라 하여 더욱 신봉하였다. 그 다음날 임금께서 금명전(金明殿)에 나아가서 북쪽을 향하여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9월 7일 스님은 보제사(普濟寺)로 돌아갔는데, 11월 5일 왕이 이 절에 행차하여 배알(拜謁)하고, 적황색(赤黃色) 비단 바탕에 수를 붙인 가사를 올리고 경앙(敬仰)하는 마음이 지중하여 더없이 그치질 아니하였다. 지금의 임금께서도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 예대(禮待)함이 더욱 돈후하여 특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금란가사를 올려 스님의 도덕을 표창하였다. 2년 정묘(丁卯)에 이르러 늙음을 이유로 진주(晋州)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갈 수 있도록 빌었으나, 왕은 개경에 더 머물기를 만류하였다가 스님의 뜻이 견고하여 왕이 마지 못해 잠시 돌아가 쉬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미 허락을 받고는 3월 5일에 출발하여 천화사(天和寺)에 머물렀다. 왕이 또 뵙고자 하여 광명사(廣明寺)로 맞이하려 하였는데, 스님은 호연(浩然)한 뜻을 가졌지만, 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3일에 이르러 몰래 빠져나와 (결락)에 이르렀다. 왕이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중귀인(中貴人) 김존중(金存中)과 우가승록(右街僧錄) 한주(翰周)를 보내어 배행(陪行)토록 하여 9월 3일 단속사에 도착하였다.
스님은 비록 산중에 물러나 있으나, 축성(祝聖)하는 정성은 날로 더욱 돈독하였다. 따라서 임금의 돌아보는 성의도 또한 조금도 적어지지 아니하여, 자주 왕인(王人)을 보내 지극한 예를 닦았다. 스님은 그 천성(天性)이 선행(善行)을 좋아하여 학인(學人)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므로, 현학(玄學)하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물과 같이 찾아와서 항상 회하(會下)의 대중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승당(升堂)하여 입실(入室)하고 심인(心印)을 전해받으며 골수(骨髓)를 얻어 당시 대종장(大宗匠)이 된 스님이 또한 상당수에 이르렀다. 드디어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며 조도(祖道)를 광양(光揚)하여 동국(東國)의 선종을 중흥하였으니, 실로 스님의 법력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스님의 업적이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사방(四方)으로 유전(流傳)하였다. 특히 명필(名筆)이어서 찰한(札翰)이 정묘(精妙)하여 옛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스님의 필적(筆蹟)을 얻은 사람들은 지극히 귀중한 보배로 여겼다.
9년 갑술에 발병(發病)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지었다.
확연히 공하여진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해탈(解脫)의 출입문(出入門)이 아님이 없네!
쓸데없는 이견(異見)을 내지 말아라
속절없이 몽중(夢中)에 앉아 있을 뿐
13년 무인(戊寅) 6월 4일 다시 병이 나서 15일에 이르러 문인(門人)들에게 부촉하기를, "내가 돌아갈 곳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각기 수도 정진에 전력하고, 삼가하여 세속의 예를 따라 장례식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게송을 설하여 이르기를,
성진(聖辰) (결락)
단정히 홀로 앉아 심종(心宗)을 관(觀)해
확연히 스스로 쾌락(快樂)하면서
청풍(淸風)과 더불어 유희하노라.
게송을 설(說)하여 마치고 단정히 앉아 차수(叉手)하고 입적하시니 안색(顔色)이 평소와 같았다. 춘추(春秋)는 90세요, (결락) 하늘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고 오직 푸른 일동(一洞) 뿐이었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리다가 잠시 후 비가 그치고 오색(五色) 무지개가 동구(洞口)에서 하늘로 뻗쳤다. 문인(門人)들이 왕에게 올리는 유장(遺狀)과 왕사의 인보(印寶)를 받들어 말을 타고 개경으로 가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비도(悲悼)하시고는, 곧 내신(內臣) 한취(韓就)와 일관(日官) 음중인(陰仲寅)등을 보내어 장사(葬事)를 감호(監護)케 하였다. 7월 15일에는 예를 갖추어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고, 16일에 진주(晋州) 소남역(少男驛)북쪽 산에서 다비(茶毗)하였으며, 28일에 유골을 단속사 북쪽 독립산정(獨立山頂)에 봉안하였다.
문인들이 국사의 비(碑)를 세울 수 있도록 임금께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신 지무(之茂)에게 명하여 비명을 짓도록 하였으나, 신(臣)은 이를 감당할 재목이 못되니, 어찌 대사(大師)의 아름다운 자취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으리오마는 임금의 엄명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 우선 대강 문인들이 기록한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하고 명(銘)하여 이르되,
부처님의 이심전심(以心傳心)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오묘하온 그 경지(境地)는 사의(思議)치 못해
삼처(三處)에서 가섭에게 전해주실 때
연꽃송이 들어보여 전법(傳法)하였다. (1)
27조(二十七祖) 잇고 이어 끊이지 않고
한 등불이 다른 등에 전(傳)함과 같이
달마대사 인도에서 동토(東土)로 와서
그 법등(法燈)이 혜능(慧能)까지 전하여오다. (2)
그로부터 5파7종(五派七宗) 문(門)이 갈라져
등과 등이 이어져서 백천등(百千燈)으로
그로부터 의발(衣鉢)들은 전하지 않고
종파(宗派)마다 자기종풍(自己宗風) 천양(闡揚)하였다. (3)
온 천하(天下)에 서래밀지(西來密旨) 전파되어서
최상근기(最上根機) 몰량한(沒量漢)만 감당하도다.
이와 같은 달마가풍(達磨家風) 계승한 이는
위대하신 우리 국사 한 분 뿐일세. (4)
일찍부터 혜소국사(慧炤國師) 의지하여서
묻고 배워 사자간(師資間)에 상투(相投)하였네.
최상종승(最上宗乘) 격외조령(格外祖令) 전해받고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참방(參訪)하였다. (5)
정통하신 그 법력은 비길 데 없고
이름높은 명찰(名刹)마다 두루 거쳐서
후학들을 제접(提接)하여 지도하면서
당간주(幢竿柱)를 높이 세워 제창(提唱)하였다. (6)
곳곳마다 그 자리서 조령(祖令)을 들어
하늘 높이 인천안목(人天眼目) 걸어놓았네!
그 이름이 사방(四方)으로 널리 떨쳐서
사천(西天)에서 중국(中國)으로 전하여졌네! (7)
저와 같은 선백(禪伯)들도 모두 다 함께
합장하고 정성모아 흠모하였고
높은 법력 귀한 덕은 만인(萬人)이 추앙(推仰)
마침내는 왕사(王師)되어 존경받았네! (8)
자비(慈悲) 구름 허공 중에 두루 덮어서
윤택하온 감로법우(甘露法雨) 고루 뿌리다.
복잡하던 개경(開京)거리 벗어나려고
여러차례 표청(表請)하여 귀산(歸山)을 빌다. (9)
바다 위에 떠있는 배 매달 수 없듯
떠나려는 육환장(六環杖)을 붙들 수 없네.
고산중(故山中)이 그리워서 돌아갔지만
임금 향한 축리심(祝釐心)은 변함이 없네. (10)
소요(逍遙)하게 인연따라 방광(放曠)하면서
무소유심(無所有心) 구함 없이 자재(自在)하였다.
유수(流水)같이 가는 세월 90이 되어
6월 중순 15일에 병(病)을 보였네.
단정(端正)하게 가부(跏趺)하고 입적(入寂)하시니
얼굴빛은 평소같이 변함이 없고
많고 많은맑은 향기 자욱하였고
우뚝하고 위대하신 높은 자취를
돌을 깎아 글을 새겨 비(碑)를 만들어
지리산(智異山) 하(下) 단속사에 높이 세우다.
대금(大金) 대정(大定) 12년 임진 정월에
문인(門人) 주지(住持) 허정(虛淨) 삼중대사(三重大師) 신(臣) 연담(淵湛)이 왕명을 받들어 비석을 세우고,
문인(門人) 대사(大師) 회량(懷亮)과 참학(參學) 처단(處端)등은 글자를 새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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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00
宋憙準, 2000, 「斷俗寺의 創建 이후 歷史와 廢寺過程」『南冥學硏究』9,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논문
1998
崔完秀, 1998, 「우리나라 古代·中世 書藝의 흐름과 특질」『옛 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서울 예술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