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이름은 영석(永錫)이고, 자(字)는 ▨▨이며, 명주(溟州)
1사람이다. ▨▨ 뛰어남이 남달랐고 강직하면서도 검소하였다. 이로움을 좇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사람을 따를 때에도 거짓됨이 없었다. 다만 벗을 사귐에 있어 옛부터 사귀어온 친구에 대해 믿음을 두텁게 하고 서로 잘 지내며 지성으로 섬겼다. 혹시 먼저 세상을 뜨는 친구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해 명복을 빌어 주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는데, 지은 글이 모두 사람들의 의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건통(乾統)
2 연간에 조음(祖蔭)으로 처음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되었다. 병신년(예종 11, 1116)에 궁전고판관(弓箭庫判官)에 제배되고, 거듭 승진하여 대악서승 권지춘방통사사인(大樂署丞 權知春坊通事舍人)이 되었다. 경자년(예종 15, 1120 ) 봄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3 이듬해에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를 더하였다. 임인년(예종 17, 1122) 여름에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수룡(隨龍)한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고, 곧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고쳤다. 계묘년(인종 1, 1123) 봄에 시상의봉어(試尙衣奉御)로 옮기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곧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더하였다. 겨울에는 시예부낭중(試禮部郞中)을 더하고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마침 이씨(李氏, 李資謙)가 일을 벌이자, 인친(姻親)이 되는 까닭에 강등되어
4 병부원외랑 지제고(兵部員外郞 知制誥)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고치고, 기유년(인종 7, 1129) 여름에는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로 나갔으며, 이듬해에는 전부목사(全州牧使)로 옮겼다. 임자년(인종 10, 1132) 겨울에는 불려와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고, 을묘년(인종 13, 1135) 여름에는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을 겸하였다. 곧 시대부소경(試大府少卿)으로 옮겼고, 병진년(인종 14, 1136) 가을에는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겸하였으며, 겨울에는 위위소경 태자전내(衛尉少卿 太子典內)를 더하였다. 이듬해 겨울 비서소감 보문각대제(秘書少監 寶文閣待制)로 옮겼다. 이듬해 가을 지첨사부사(知詹事府事)를 겸하고, 그 해 겨울에는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에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바뀌었다. 경신년(인종 18, 1140) 겨울에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지방관직을 맡을 것을 청하니, 조산대부 비서감(朝散大夫 秘書監)으로 지남경유수사(知南京留守事)가 되고, 이듬해 겨울에는 불려와 시상서우승(試尙書右丞)이 되었다. 황통(皇統)
5 2년 임술(인종 20, 1142)에는 시사재경 지병부사(試司宰卿 知兵部事)로 고쳤다. 3년 겨울 위위경 태자우서자(衛尉卿 太子右庶子)로 옮기고, 4년 겨울에는 지삼사사(知三司事)를 겸하였다. 5년에는 전중감(殿中監)으로 옮기고, 그 해 겨울 시병부상서(試兵部尙書)를 더하였다. 6년 여름 조의대부(朝議大夫)를 더하였다가 겨울에는 진(眞, 병부상서)이 되었다. 8년 봄 선경부첨사(善慶府詹事)를 겸하고, 가을에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고치고, 9년에는 상서우복야 삼사사(尙書右僕射 三司使)로 옮겼다. 천덕(天德)
6 3년(의종 5, 1151) 여름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 判禮部事)에 임명되었다. 4년 겨울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고, 계유년(의종 7, 1153 ) 봄 예부(禮部)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7 겨울에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더하고, 갑술년(의종 8, 1154) 겨울에는 특진 수대위(特進 守大尉)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공의 나이가 65세였는데, 풍비(風痺)로 인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이 굳게 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임금이 그 뜻을 어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마침내 허락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집에서 병을 다스린 지 13년이 지난 병술년(의종 20, 1166) 4월 8일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다. 나라에서 예를 후하게 하여 장례지내니, 자녀들이 서역(西域)의 다비법(茶毗法)에 따라 그 유해를 거두었다.
아버지는 배향공신(配饗功臣)이자 수대부 문하시중 판상서이형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겸 판국학사(守大傅 門下侍中 判尙書吏刑部事 監修國史 上柱國 兼 判國學事)인 인존(仁存)이고,
8 조부는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병부사 감수국사 상주국(守大尉 門下侍郞平章事 判禮·兵部事 監修國史 上柱國)인 상기(上琦)이며, 증조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이자 대사(大師)로 추봉된 김양(金陽)이다. 어머니는 경원군부인 이씨(慶原郡夫人 李氏)이고, 외조는 수사공 경원군개국백 상주국(守司空 慶源郡開國伯 上柱國)인 이호(李顥)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공수(李公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넷을 낳았다. 장남은 일찍 죽었고, 차남은 군기주부 직한림원(軍器注簿 直翰林院) 굉(閎)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3남은 내시 호부시랑 충사관수찬관 겸 태자세마(內侍 戶部侍郞 充史館修撰官 兼 太子洗馬) 천(闡)이고, 4남은 좌우위장사(左右衛長史) 항(閌)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일찍 죽었고, 차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배진(裴晉)과 결혼하였다.
공은 ▨을 갖추고 벼슬길에 뛰어올라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네 차례 지방관직을 맡았고, 세 차례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되었으며, 한 차례 북로원수(北路元師)가 되었다. 위로는 임금의 뜻에 맞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소망과 합치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한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니 뽑은 사람들이 모두 이름이 났다. 일찍이 송(大宋)과 신라(新羅)의 의학서적을 보면서 기이하고 중요한 것을 뽑아 책을 만들어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이라고 하니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공은 벌열(閥閱)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만물(萬物)에 두루 밝음이 뭇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박물군자(博物君子)이다. 그 아들들이 내시 대부소경 태자문학(內侍 大府少卿 太子文學) 김거실(金居實)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 “정해년(의종 21, 1167) 2월 27일에 승천부
9 청화사(承天府 淸花寺) 산기슭에 장례를 지내고자 하니, 그대가 지(誌)를 지어 주십시오.” 마침내 그 글을 받고 울면서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다행히 집안끼리 통한 이후, 평소에 우러러 존경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섬기었으며, 공 역시 나를 아들 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때문에 그 아들들과 더불어 친하기가 동기간[骨肉]보다 더하였으며, 공의 평소 모습을 자못 자세하게 알 수 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말은 천박하고 부족하지만 눈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고, 이에 묘지명을 지어 애도하는 바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부하고 귀하면서도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충성과 신의에 겸하여 검소한 덕도 닦았다.
지위는 태사(台司)에 올라서
온 나라를 통치하였다.
이에 명을 새겨서 간직하니
끝없이 전해지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