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은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에 위치해 있는데, 종래 조선 초기의 인물인 하연(河演)의 무덤으로 알려져 하무덤이라 일컬어져 왔으나, 1949년에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의 벽화고분임이 확인되었다. 무덤은 구릉의 한쪽 면을 따내고 바닥을 파내서 석실을 구축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석실봉토분인데, 외형은 방대형(方臺形)이다. 묘실은 남쪽인 앞에서부터 연도, 연실, 전실, 전실 좌우의 2측실, 후실,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과 후실 사이, 후실 뒷면과 회랑 사이에는 돌기둥들을 세워 서로 투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묘실의 천장은 말각조정(抹角藻井) 방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천정과 각 벽면에는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한 다양한 벽화가 있는데, 연도에는 위병(衛兵), 동측실에는 방앗간·우물·부엌·육고·차고·외양간·마구간, 서측실에는 주인공 내외의 좌상과 시종자, 전실에는 호위무사들과 무악(舞樂)의 장면, 후실에는 무악(舞樂)의 장면, 회랑 벽에는 주인공의 출행 장면, 천장에는 일월상과 각종 문양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실 서벽 좌측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진대(晋代)의 사경체(寫經體)로 씌여진 7행 68자의 묵서명이다. 이것은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사망일자, 작위, 관직, 고향, 자(字), 향년을 기록해 둔 것으로, 이에 의하면 동수는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묵서를 통해 안악 3호분이 4세기 중엽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벽화고분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시기를 올려볼 수 있게 하였다. 안악 3호분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현을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이후라고 보는 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이 묵서는 안악 3호분이 357년 경에 축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 시기를 4세기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 고구려 벽화고분의 편년 기준을 제공한다. 안악 3호분은 구조형식상으로는 감(龕)·측실(側室)묘, 벽화 내용상으로는 인물·풍속도를 주제로 한 고분으로 분류된다. 이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10여 기 이상이지만, 이들 고분에서는 축조시기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악 3호분은 이들 고분의 축조시기를 짐작하는 데 단서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묵서는 문헌에 전하지 않는 고구려사의 일면을 짐작케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묵서의 주인공인 동수(冬壽)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33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여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한 동수(佟壽)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헌에는 망명 이후의 동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묵서는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한 후에도 다양한 작위와 관직을 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안악 3호분이 그의 무덤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바, 그렇다고 한다면 그는 이처럼 웅장한 분묘를 조영할 수 있을 정도로 안악지방에서 상당한 세력을 누렸음을 짐작케 한다. 나아가서 망명객에 불과한 동수가 이 만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기반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 수도 있다.
이렇듯 안악 3호분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주는 것이지만, 피장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묵서명의 주인공인 동수라는 설, 고구려의 왕이라는 설로 갈라지고 있으며, 고구려 왕이라는 설에서도 미천왕이라는 견해와 고국원왕이란 견해로 다시 갈라지고 있다.
한편 벽화의 군데군데 주서(朱書)가 보이는데, 이것은 벽화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 안악 3호분의 묘주 논쟁에 대하여
안악 3호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많은 주목이 있어 왔다. 그 중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것은 묘주(墓主)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였다. 안악 3호분에서 묘주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서측실 입구 왼쪽의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동수에 관한 묵서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묵서명으로 말미암아 동수가 묘주란 설이 나오게 되고, 이에 동수묘설을 반대하는 왕릉설이 제시되게 되어, 묘주 문제가 논의의 초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안악 3호분이 발견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묘주 문제를 놓고 지금까지 어떤 논의들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던가를 살펴보는 것은 안악 3호분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안악 3호분이 발견된 것은 1949년이며, 이를 도유호가 그 해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묘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묵서명이 있음으로 해서, 안악 3호분의 묘주는 동수이며, 동수는 전연(前燕)으로부터의 망명자라는 추정은 일찍부터 있어 왔던 것 같다. 이러한 견해를 북한에서 처음 피력한 것은 김광진으로 알려지고 있다(전주농).
그런데 1955년에는 리여성이 동수묘설을 반대하면서, 안악 3호분은 고국원왕의 능이며, 동수는 배장자란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렇듯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이견이 있게 되자, 1956년 북한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는 ‘안악 3호분의 년대와 피장자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묘주가 중국인 망명자란 설과 고구려왕이란 설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윤원에 의해 미천왕이 묘주란 설이 새롭게 제시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묘주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1959년 김용준은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어 오던 묘주 문제를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 「안악 제3호분(하무덤)의 년대와 그 주인공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김용준은 우선 안악 3호분이 고국원왕릉이란 설에 대해 ① 고국원왕(故國原王)이란 이름으로 미루어 왕의 무덤은 고국원(故國原)에 있으며 고국원은 통구(通溝)에 있는 지명이라는 점, ② 고국원왕보다 15년이나 먼저 죽은 동수가 고국원왕릉에 배장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묘주를 중국인 망명객 동수로 보았으니,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① 동수에 대한 묵서명이 있으며, 이것은 곧 동수의 묘지명이라는 점.
② 동수는 태수를 칭하고 있는데, 묘주를 시종하는 인물들의 직명(職名 : 記室, 省事 등)은 『진서(晉書)』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태수급의 속관명(屬官名)이라는 점.
③ 무덤의 구조형식이 고구려 원래의 묘제인 적석총의 발전형태가 아니라, 요양(遼陽)지역의 석곽묘(石槨墓)를 비롯한 북중국의 묘제와 유사하다는 점.
④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복식이 고구려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런데 동수묘설에 대해서는 기왕에 ① 묵서가 묘주도 근처에 있지 않고 서측실 입구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있는 점, ② 망명객의 것으로 보기에는 무덤의 규모가 너무 크고 벽화 내용이 풍부한 점, ③ 회랑에 그려진 행렬도에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보인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① 중국의 벽화고분 중에서도 서측실 입구에 명찬(銘贊)이 씌여진 경우가 있으므로 묘지명이 서측실 입구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② 무덤의 규모가 큰 것은 동수가 봉건영주와 같은 지위를 누렸기 때문일 것이며, ③ 성상번의 ‘聖’자는 불확실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지적들이 동수묘설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김용준이 동수묘설을 주장하던 이듬해인 1958년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 의해 『안악 3호분 발굴보고』가 출간된다. 이것은 안악 3호분에 대한 정식 발굴보고서이지만, 묘주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함을 의식해서인지 ‘이 분묘의 주인공을 밝히는 것은 속단을 피하고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안악 3호분은 벽화에다 축조연대를 짐작케 하는 묵서까지 있음으로 해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1952년에 안악 3호분을 처음 소개한 도유호의 글이 번역되었고, 숙백(宿白)이 이를 부연 설명하면서 묘주가 전연으로부터의 망명자인 동수임을 언급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안악 3호분의 묘주를 동수로 보는 것이 통설화되어 이를 동수묘(冬壽墓)라 지칭했고, 묘주 비정을 둘러싸고 북한에서 논란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동수설을 재확인하는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洪晴玉).
일본에서는 1956년에 이진희(李進熙)가 처음 소개하였지만, 묵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여 안악 3호분의 축조시기를 5세기 중엽으로 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웅곡선부(熊谷宣夫)가 묵서명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묘주를 동수(冬壽)라고 했지만, 그 역시 묵서명의 전문(全文)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일본을 통하여 안악 3호분 발견 소식이 전해졌고, 1959년에는 발굴에 참여했다고 하는 채병서(蔡秉瑞)가 묵서명을 비롯한 안악 3호분의 전모를 소개하면서 동수를 묘주로 보았다. 또 1960년에는 김원룡(金元龍)이 고구려 벽화고분의 기원을 논하면서 이를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안악 3호분을 동수묘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북한에서 고국원왕릉설과 미천왕릉설이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에 대한 비판이 시도되고 있는데, 동수가 고국원왕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고국원왕릉에 동수에 관한 묵서가 있을 수 없고,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서 찾아온 것은 343년이며 이 무덤이 축조된 것은 동수가 죽은 357년 경인 만큼 미천왕릉일 수도 없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렇듯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으로 보려는 쪽으로 견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전주농이 왕릉설을 다시 주장하였다. 그는 1957년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악기 문제를 다룰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악 3호분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왕릉임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면서 주장하였다. 물론 이중에는 기왕에 왕릉설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들도 있지만, 이를 종합하고 또 자신의 새로운 근거를 첨가하여 왕릉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그는 왕릉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동수묘설의 잘못을 지적한다.
즉 묵서명이 동수묘설에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으나, 묵서명은 위치도 서측실 입구 장하독 그림 위라는 군색한 자리이며, 또 글씨도 격식과 성의를 다한 것이 아니므로 (글씨의 크기도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잘못 쓴 글씨를 지우지도 않고 그 위에 바른 글자를 덧씌운 것 등), 묘주의 묘지명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묵서명을 장하독인 동수에 관한 것이라 하였고, 또 낙서의 일종으로 보았다.
또 묘주를 시종하는 인물들의 직명이 태수급의 속관명(屬官名)이란 점에서 동수묘설이 주장되고 있으나, 『진서』직관지에 의하면 ‘기실(記室)·성사(省事)’ 등은 주군(州郡) 장관보다 고위직인 제왕(諸王)·삼공(三公) 등의 속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안악 3호분이 동수묘가 아니라 오히려 왕릉임을 뒷받침하는 것인 바, 왜냐하면 고구려왕의 내시부(內侍府)가 중국의 제왕(諸王)·삼공(三公)의 속관(屬官) 조직을 참조하여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전주농은 안악 3호분이 왕릉인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제시하였다.
① 묘실의 구조형식이 다른 고구려 벽화고분과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그 중에서는 가장 복잡 웅대한데, 이렇듯 거대한 무덤은 왕릉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는 점.
② 회랑 벽화의 대행렬도는 등장인물이 250명이 넘는 바, 왕의 노부행렬(鹵簿行列)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
③ 노부행렬도(鹵簿行列圖)의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확실히 보이며, 성상(聖上)이란 글자가 보인다는 것은 묘주가 곧 왕이기 때문이라는 점.
④ 행렬도에 보이는 아기(亞旗)나 정절(旌節. 정절은 서측실 묘주 帳房 옆에도 있음)은 모두 왕의 의장(儀仗)이라는 점.
⑤ 서측실의 묘주도에서 묘주가 착용한 관은 『수서(隋書)』에서 왕만이 쓸 수 있다고 한 백라관(白羅冠)이며, 의복 역시 왕의 의복인 대수자포(大袖紫袍)라는 점.
⑥ 서측실 묘주도에서 묘주를 시립(侍立)하고 있는 인물들이 홀(笏)을 들고 있는데, 홀의 성질로 미루어 시립하고 있는 인물들은 왕의 신하라는 점.
⑦ 서측실의 여주인공과 기타 여인들의 결발(結髮) 모양이 궁중의 머리 모양이라는 점.
그렇지만 그는 안악 3호분의 묘주가 고구려의 어느 왕인가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왕릉이 왜 안악 지방에 있으며, 그 속에 왜 동수에 대한 낙서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수묘설의 중요한 근거인 안악 3호분의 구조형식이 요양지역 석곽묘를 비롯한 중국의 묘제와 상통한다는 점과, 인물들의 복식이 고구려의 것과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전주농의 왕릉설은 아직 미해결의 과제를 많이 내포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모사하는 과정에서, 서측실 입구 오른쪽 장하독 그림 위에서도 묵서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비록 판독 가능한 글자는 2자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동수묘설에 불리한 증거가 되는 동시에 왕릉설의 입지를 크게 강화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왕에 알려진 묵서도 묘주의 묘지명이 아니라, 서측실 입구 왼쪽 장하독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며, 나아가 묘주는 동수와 별개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힘입어, 1963년 북한의 박윤원·주영헌·전주농이 왕릉설을 보강하여 미천왕이 묘주임을 다시 거론하고 나온다. 이들의 글은 모두 『고고민속』1963년 1호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미천왕릉설을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박윤원의 견해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점들을 토대로 동수묘설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① 동수의 묵서는 그 아래 장하독과 관련된 것이며, 묘주의 묘지명이 아닌 점.
② 기실(記室)·장하독 등은 태수급 소속의 직명이 아니라, 고구려 정부의 중요 관직명인 점.
③ 태수나 도향후(都鄕侯)급의 무덤으로서 이처럼 규모가 큰 실례가 없는 점.
④ 의장 행렬도의 규모가 크고, ‘성상번(聖上幡)’이 있는 점.
⑤ 서측실 입구 오른쪽 장하독(帳下督) 위에도 묵서가 존재하는 점.
⑥ 무덤의 구조형식에 외래적 요소가 보인다는 것은 문화 교류상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
⑦ 동수가 ‘낙랑상(樂浪相)’이었던 점이 강조되고 있으나, 이는 대단한 관직이 아니라는 점.
⑧ 고구려가 남진책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망명객인 동수가 안악에서 군림할 수는 없다는 점.
그래서 안악 3호분을 왕릉이라고 할 때, 다음으로 묘주가 어느 왕인가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그는 안악 3호분에 영화(永和) 13년(357)이란 절대연대가 있으므로, 묘주를 고국원왕(331~371)과 그 전왕인 미천왕(300~331)으로 좁힐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왕의 이름으로 미루어 능이 국내성 고국원에 있었을 것이므로 묘주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미천왕릉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천왕릉이 안악에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미천왕의 무덤도 원래는 국내성에 있었지만, 342년(고국원왕12) 미천왕의 유해가 전연의 침입군에 의해 탈취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고구려의 노력으로 반환된다. 그리고 그 해 7월 고구려는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으로 천도한다. 이에 고국원왕은 부왕을 재장(再葬)할 곳을 평양 이남에서 찾았고, 그래서 안악 지방에 미천왕릉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왜 동수의 묵서가 미천왕릉에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동수가 미천왕 시신의 반환 문제, 전연의 포로가 된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의 귀국 문제, 미천왕릉의 구축 문제 등에 일정하게 관계했기 때문에, 후일 주씨를 미천왕릉에 합장할 때 그의 공적을 기리어 왕실에서 써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주영헌의 견해는 그때까지 알려진 고구려 벽화고분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피장자의 해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는 안악 3호분이 이질적이며 특수한 무덤이 아니라, 다른 고구려 벽화고분들과 공통한 특징을 가진 고구려 벽화무덤의 한 유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악 3호분은 구조 형식에 있어서는 ‘감(龕) 또는 곁간[側室]이 있는 무덤 류형’이며, 벽화 내용에 있어서는 ‘인물풍속도를 그린 무덤 류형’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같은 벽화고분이라도 묘실의 규모와 벽화의 풍부함이 무덤에 따라 다른 것은 묘주의 신분이 다르기 때문인데, 안악 3호분은 같은 유형의 무덤들에 비해 묘실의 크기가 2~4배나 될 뿐 아니라 벽화 내용도 가장 풍부한 바, 이는 안악 3호분이 왕릉임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영헌은 기왕에 왕릉설의 논거로 제시되어 왔던 ‘성상번(聖上幡)’의 존재, 묘주의 백라관(白羅冠) 착용 등을 되풀이 언급하고 있지만, 행렬도의 규모가 마멸된 부분까지 계산하면 500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 점과 행렬도는 고구려 5부의 군사가 독립된 단위로서 행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고 한 점은 새로운 것이다. 이와 같이 안악 3호분이 왕릉이라면 다음으로 어느 왕릉인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해 주영헌은 미천왕릉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논거는 위에서 설명한 박윤원의 견해를 답습한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또 전주농의 글은 전고(前稿)에서 설명이 되지 못했거나 미진했던 점들을 논한 것인데, 여기서는 먼저 전고에서 결론을 유보했던 묘주 비정을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박윤원과 같은 근거에서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으로 보았고, 또 안악 지방에 미천왕릉이 축조된 것을 이곳이 미천왕에 의해 개척된 곳으로서, 고국원왕의 입장에서는 부왕의 공덕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안악 3호분의 축조연대를 추정하였는데, 343년 동황성으로 천도한 직후부터 348년 사이로 보았다. 그렇다고 할 때 안악 3호분은 동수가 죽기 10년 전에 이미 완성되었던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는 동수묘설이 부당함을 지적하는 새로운 논거 제시와 왕릉설 비판에 대한 반대 비판을 시도하는데, 그 첫번째로 영화9년명전축분(永和九年銘塼築墳)(353)의 피장자를 통해 고구려에서의 동수의 위치를 생각해 보고 있다. 영화9년명전축분은 1932년 평양역 구내에서 발견된 것인데, 유명전(有銘塼)이 있음으로 해서 피장자가 요동한현토태수(遼東韓玄菟太守)인 동리(佟利)이며, 축조시기가 353년 경임이 알려진 무덤이다. 전주농은 이 동리 역시 중국인 망명객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동리의 무덤은 규모도 작고 부장품도 고구려식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에서의 동리의 권세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런데 동리는 동씨라는 점, 태수급이라는 점, 중국인 망명객이란 점, 4세기 전반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점 등에서 동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의 동수의 처지도 안악 3호분과 같은 대규모 벽화고분을 축조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안악 3호분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를 생각해 보고 있다. 전주농도 구조 형식과 벽화 내용에 있어 외래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그것도 국한된 구조적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며, 안악 3호분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 고구려 벽화고분의 한 유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외래적 요소가 보이는 것은 중국인 망명객인 동수가 무덤 축조에 관계했기 때문으로 설명하였다. 동수에 관한 묵서가 안악 3호분에 있는 것도 왕모 주씨를 장사할 때 바로 이러한 그의 공적을 추모해서 써넣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박윤원·주영헌·전주농의 견해가 발표되면서,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북한 학계의 논쟁은 일단락되어 미천왕을 묘주로 보는 것이 정설로서 굳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1966년에는 미천왕릉이란 전제 위에서 안악 3호분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한 『미천왕무덤』이란 서적을 간행한다. 여기서도 안악 3호분의 ‘구조 형식과 벽화 내용’·‘벽화를 통하여 본 고구려인의 생활’·‘무덤의 건축구성과 벽화의 예술형상성’과 함께, 피장자가 미천왕이라는 점이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부분은 박윤원·주영헌·전주농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며 새로운 것은 없지만,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기왕의 성과를 일단 결산한 것이란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으로 보는 견해는 이후 70년대까지 북한 학계의 통설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간행된 개설서류들을 보면, 안악 3호분을 미천왕무덤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도 안악 3호분에 대한 연구는 이것이 왕릉이란 전제 위에서, 또는 이를 뒷받침하는 방향에서 전개된다. 예컨대 고분의 규모 등을 토대로 고구려 벽화고분의 묘주의 신분등급을 나누면서 안악 3호분을 왕릉급으로 분류한다든지(최택선), 안악 3호분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복식이 여타 고구려 벽화고분들과 다른 것은 ‘결코 다른 나라의 옷이거나 그 영향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4세기 중엽 고구려 왕궁 복식 자체의 다양한 양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천석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발표된 글에서는 묘주가 미천왕이라는 단정을 유보하고 있다. 심지어 60년대 미천왕릉설의 주장자였던 주영헌조차도,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고구려왕이라고 하면서도 미천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박진욱이 고국원왕설을 다시 들고 나오는데, 그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묵서의 주인공인 동수는 미천왕 사후에 고구려로 망명한 자이므로, 미천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동수에 대한 묵서와 그림이 있는 안악 3호분이 미천왕릉일 수는 없다.
② 고국원왕이 부왕의 무덤을 다시 조영했다면, 그것은 미천왕의 유해를 찾아온 직후일 것인데, 이때는 아직 고구려가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천왕릉도 국내성이나 환도성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③ 고국원왕 말기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 동황성이며, 그가 전사한 곳은 황해도 신원군 하성(下星)으로 비정되는 남평양이다. 따라서 고국원왕의 무덤이 국내성이나 환도성 부근에 조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고국원이란 지명이지만, 삼국시대에는 충주를 국원(國原)이라고도 한 바, 국원이란 지명이 여러 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안악 지역이 고구려시대에는 고국원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고국원왕설은 최근 손영종에 의해 다시 주장되었다. 이에 따라 한때 제기되었다가 사라져간 고국원왕설은 이제 다시 북한 학계의 새로운 통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 학계에서는, 묘주가 구체적으로 어느 왕인가에 대해서는 견해의 전환이 있는 것 같지만, 안악 3호분을 왕릉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안악 3호분을 왕릉, 구체적으로는 미천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예컨대 상원화(上原和)의 견해가 그것으로, 서측실의 묘주 부인도는 생기가 넘치는 데 반해 묘주의 초상화는 얼굴에 생기가 없고 여러 번 덧그린 것인 바, 미술사의 시각에서 볼 때 이는 화가가 주인공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것은 묘주가 죽은 지 오랜 미천왕이어서 안악 3호분의 벽화를 그린 화가는 생전의 미천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제외한 한국·중국·일본 학계에서는 안악 3호분이 소개된 이래 지금까지 동수묘설이 여전히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안악 3호분의 묵서의 전문을 처음 소개한 것은 1959년 이진희(李進熙)였으며, 그는 이것을 묘지명으로 보아 묘주를 동수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동수묘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논한 것은 1964년 강기경(岡崎敬)이었다. 강기경(岡崎敬)은 구조 형식과 벽화의 주제 및 수법에서 요양 석곽묘와 가깝고, 묵서명의 내용이 묘지명이기 때문에, 안악 3호분을 전연으로부터의 망명자인 동수의 무덤으로 보아도 어떤 모순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그는 고구려에서의 동수의 위치를 살폈는데, 결론은 동수가 낙랑·대방의 유민에다 요동군에서 내려온 한족들까지 규합하여 유력자로 군림하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반독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도 안악 3호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나, 이들은 대부분 동수묘설에 입각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채병서와 김원룡이 동수묘설을 제시한 이래, 한동안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있다면 1978년에 김정배(金貞培)가 50년대 말·60년대 초에 이루어진 북한의 묘주 논쟁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최근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부각되는데, 우선 1989년 공석구(孔錫龜)가 이 문제를 다시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공석구의 연구는 안악 3호분에 보이는 문자 자료들을 가장 치밀하게 분석했다는 데 특징이 있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동수 묵서명은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발견된 당시의 묘지(墓誌)들과 비교해 볼 때, 문장의 체제나 형식(예컨대 출신지 표기 방법) 등이 유사하므로 묘주의 묘지명으로 볼 수 있다.
② 왕릉설에서는 동수를 묘주의 장하독으로 보고 있으나, 장하독은 문헌에 태수의 속관으로 나오는 바, 태수급인 동수와 장하독이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오히려 장하독이 있음으로 해서 이 무덤의 주인공은 태수급이 될 수 있다.
③ 묘주를 시위하고 있는 인물들의 관직을 검토한 결과, 동수는 이들을 속료로 거느릴 수 있는 관계상(官階上)의 위치에 있다.
④ 영화란 연호는 12년으로 끝나며 이듬해 정월 승평(升平)으로 개원(改元)하는데, 왕릉이라면 개원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모르고 영화 13년이라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⑤ 미천왕을 전후한 시기 고구려 왕릉은 당시 국도였던 통구(通溝) 주변에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미천왕릉만이 안악에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⑥ 왕릉설에서는 고구려에서 동수에게 묵서명에 보이는 관직들을 주었다고 하는데, 묵서명에 열거된 관직이나 관등명은 당시 고구려의 것이 아니다.
⑦ 그렇다고 해서 동진(東晉)에서 수여한 것으로 볼 수도 없으니, 왜냐하면
a) 중국의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는 군사를 도독하는 구역이 직명 속에 명시되어 있으나, 동수의 경우는 도독구(都督區)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점,
b) 중국의 경우, 평동장군(平東將軍)이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을 겸하는 것은 예외적인 것이라는 점,
c) 중국의 경우 군의 장관은 태수, 군과 같은 규모인 왕국의 장관은 289년 이전에는 상(相), 289년 이후에는 내사(內史)이다. 그런데 낙랑군은 왕국이 된 적이 없었는데도 묵서명에서는 낙랑상(樂浪相)이라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직명대로라면 상(相)이 아니라 내사(內史)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수의 관직과 작위는 고구려나 동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동수가 자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공석구는 보다 실증적 연구를 통해 남한 학계의 통설을 재확인하였지만, 1997년 이인철(李仁哲)은 새로운 근거를 토대로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다.
① 안악 3호분의 묵서명이 묘주에 관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묘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안악 3호분은 동수가 죽은 357년(영화 13) 보다 훨씬 뒤에 축조되었다는 데 근거한다. 즉 안악 3호분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가 그려진 벽화고분은 모두 고구려가 불교를 수용한 372년 이후에 축조되었다. 또 안악 3호분 묵서명에서는 동수의 출신지를 유주(幽州)의 요동군(遼東郡)이라 했는데, 요동군이 유주에 소속된 시기는 370~380년 사이이다. 그러므로 안악 3호분은 370년대에 축조된 것이어서 동수의 무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②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은 고국원왕의 왕비이다. 여주인공의 머리 모양은 선비족의 그것인데, 이런 머리 모양을 할 사람은 342년 고구려가 전연(前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전연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고국원왕의 어머니[미천왕비]와 왕비이다. 그런데 동수는 미천왕과는 관련이 없고, 고국원왕 때 고구려에 투항해 왔으므로, 여주인공은 고국원왕비이다. 그녀는 전연군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왕릉을 파헤치고 시신을 약탈해가는 만행을 알고 있었으므로, 귀국 후 보다 안전한 곳인 안악에 고국원왕릉을 이장했고, 자신도 여기에 묻혔다.
③ 동수는 고구려로 망명 후 장하독이란 관직을 역임했고, 고국원왕 왕비의 송환 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고국원왕비를 합장할 때 그에 관한 묵서명을 기재했다.
지금까지 안악 3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기왕의 견해들을 일별하였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해서는 북한 학계의 왕릉설과 한·중·일 학계의 동수묘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양쪽 논거 모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쪽 견해 모두에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수묘설의 경우, ‘성상번(聖上幡)’의 존재가 문제이다. 후한대(後漢代) 화상석묘(畵像石墓)의 행렬도를 보면, 묘주가 행렬도의 주인공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묘주가 천자(天子)의 대가(大駕)에 참여한 것을 형상화한 기념사진적인 것도 있다(林已奈夫). 그렇지만 안악 3호분의 경우는 서측실의 묘주와 행렬도의 중심인물은 동일인임이 확실하므로,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상번’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없는 한, 동수묘설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다만 ‘성상번’의 ‘聖’자를 논자에 따라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분명하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미천왕 무덤』도판에는 ‘聖’자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과연 ‘聖’인가도 문제이다.
동수묘설에 비해 왕릉설은 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① 묘주인 왕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는데, 동수에 관한 묵서가 있다는 점에 대한 설명이 아무래도 부족하다.
② 묵서명이 말하는 357년과 미천왕의 유해를 찾아온 343년, 고국원왕이 죽은 371년과는 14년씩 거리가 있다는 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③ 고구려의 왕릉이 왜 안악에 조영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미천왕릉설에서는 343년 고구려가 평양동황성으로 천도했으므로 미천왕릉이 안악에 있을 수 있다고 하나, 평양 동황성이 과연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었는지도 문제이다. 또 설사 현 평양 일대라고 하더라도, 평양을 두고 하필이면 백제가 신계(新溪) 방면까지 진공해 오는 마당에 안악에 왕릉을 조영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④ 무덤의 규모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안악 3호분의 총면적은 약 46㎡라고 한다(박황식). 그런데 한말(漢末)·위진대(魏晉代)의 다실묘(多室墓) 중에는 100㎡가 넘는 것도 7기나 있으며, 50㎡가 넘는 것은 많다(加藤修). 그러므로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중국으로부터의 망명자라면, 이 정도 규모의 분묘를 조영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⑤ 왕릉설에서는 망명객인 동수가 이만한 규모를 가진 무덤을 조영할 수 없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영화9년명 전축분의 피장자인 동리와 비교를 시도한다. 그리고 안악 3호분이 고구려 벽화고분임을 밝히기 위해 같은 유형의 고구려 벽화고분과 비교한다.
그러면서도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이나 태왕릉(太王陵)과의 비교는 하지 않고 있다. 장군총이나 태왕릉 중의 하나는 광개토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왕은 5세기까지도 벽화가 있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아니라, 적석총(積石塚)에 묻힌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고구려왕이 안악 3호분과 같은 벽화가 있는 석실봉토분에 묻힌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렇듯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양쪽 모두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어느 쪽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해 둘 것은 안악 3호분에서 서쪽으로 4m 떨어진 곳에서 안악 4호분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리순진). 이것은 동서로 긴 전실과 남북이 긴 후실로 이루어진 2실분인데, 발굴자는 안악 3호분의 묘주를 임시로 묻어두었던 가묘(假墓)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