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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묘지(李公遂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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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목은문고(牧隱文藁)』권18 및 『동문선(東文選)』권127에 실려 있으며, 1366년(공민왕 15)에 이색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인 이공수(李公遂, 1308~1366)는 익주(益州 : 현재 전북 익산지역) 사람이다. 증조는 주(湊), 조부는 행검(行儉), 아버지는 애(崖)이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탐(耽)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이공수는 33세인 1340년(충혜왕 복위1)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주는 김영돈(金永暾)과 안축(安軸)이다. 이후 충혜왕·충목왕·공민왕 때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묘지명은 주로 공민왕 때 관료로서 활동한 내용이 실려 있다. 홍건적 침입과 수복 후 개경 재건을 주도한 사실, 기철 일당의 제거, 공민왕 폐위와 덕흥군 옹립 문제로 인한 원과의 마찰을 외교적으로 해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원나라 태자와 나눈 대화 등이 실려 있어 자료적인 가치가 크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부인 김씨는 신라 김부(金傅)대왕의 13대 손인 상기(上琦)의 딸이다. 자녀가 없다. 자녀가 없어 족인(族人)의 딸을 길러 안속(安束)에게 출가시켰다.
유원 자선대부 대상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 병서(有元 資善大夫 大常禮儀院使 高麗國 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益山府院君 諡文忠 李公墓誌銘 幷序)
익주(益州) 이씨는 그 명성을 칭송 받은지 오래되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인 주연(周衍)이 참군(參軍)인 렬(洌)을 낳았다. 참군은 직사관(直史官)인 영재(英梓)를 낳았다. 직사관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추증된 양진(陽眞)을 낳았다. 좌복야는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인 주(湊)를 낳았다.
승지는 조봉대부 국자전주 보문각직학사 지제고(朝奉大夫 國子典酒 寶文閣直學士 知制誥)인 행검(行儉)을 낳았다. 행검은 절조로 이름이 있었다. 행검은 형부의 관원일 때 동료들이 권세가의 압력으로 송사(訟事)에 곧은 것을 굽히자, 한사코 그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그런데 마침 공이 질병이 나서 휴가 중에 있었다. 동료들이 공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 곧 이를 자기들의 생각대로 판결하였다. 다른 사람의 꿈에 예리한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형부의 관리들을 두 조각으로 내는 일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관리들이 모두 사나운 병으로 죽고 홀로 전주(典酒 : 행검)만 아무 탈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것을 칭송하고 있다.
전주는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 監察糾正)인 애(崖)를 낳았다. 애는 통직랑중(通直郞中)인 송탐(宋耽)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 12월 24일 공을 낳았다.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재상인 전사의(全思義)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공의 자부(?夫 : 자형)이다. 전공(全公 : 전사의)이 생존했을 때 공은 이미 현달하여 전공을 아버지 섬기듯 하였고, 전공이 사망하자 그 누님을 어머니 섬기듯 하였다. 돌아가시자 합장하였으며, 제사에 예를 다하였고 늙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능히 자신을 뒤로 하였다(後己)고 말할 수 있다.
지원(至元)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공의 나이 33세에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과 순흥군(順興君) 안축(安軸)이 과거를 주관하였을 때 공은 낭장 겸 감찰규정(郎將 兼 監察糾正)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두 번 옮겨 전의주부(典儀主簿)와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봉선대부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교(奉善大夫 成均司藝 藝文應敎 知製敎)로 옮겼다.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올라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옮겼다가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다. 갑신년(충목왕 즉위, 1344) 다시 중현대부 전교령 밀직사우부대언 예문관직제학 지제교(中顯大夫 典校令 密直司右副代言 藝文館直提學 知製敎)로 승진되었다. 을유년(충목왕 1, 1345) 지신사(知申事)로 옮겼고, 그 해 겨울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 이듬해 다시 감찰대부로 승진되었다. 정해년(충목왕 3, 1347) 7월에 밀직부사에 임명되고 무자년(충목왕 4, 1348) 정월 다시 광정대부 판밀직사사(匡靖大夫 判密直司事)에 승진되었고, 4월 원나라 수도에 들어가 천수성절(天壽聖節)을 하례하고, 6월에 감찰대부를 겸하게 되었다.
경인년(충정왕 2, 1350) 정당문학에 임명되었고, 임진년(공민왕 1, 1352) 윤3월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겨 감찰대부를 겸임하였다. 10월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임명되었다. 계사년(공민왕 2, 1353) 다시 도첨의(都僉議)로 들어가 찬성사(贊成事)에 승진되었다. 을미년(공민왕 4, 1355)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안을기(安乙器)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뒤에 고관에 이른 자와 저명한 인사로 일컬어진 자가 많았다. 이해에 현릉(玄陵 : 공민왕)이 불러 정동행성 도사(征東行省 都事)가 되었다. 황제의 칙첩(勅牒)을 받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승진하고,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사적(沙賊 : 홍건적)이 우리 북방을 침범하자 공이 죽전(竹田 : 지금의 평양부근)에서 막았다. 서울이 함락되자 공은 단기(單騎)로 중원(中原 : 지금의 충주)의 행궁으로 달려가자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하였다. 임인년(공민왕 11, 1362) 6월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어 판판도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判版圖司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승진되었다. 이해에 사적(沙賊)이 패하여 달아났으나, 서울이 병란으로 파괴되어 모든 일을 새로이 해야 했다. 공이 명을 받고 와서 인재와 일의 완급을 헤아려 방략을 지시하였다. 조정에는 정치가 폐지된 것이 없었다. 근로하는 자에게 그 노고를 보상하고, 돌아온 자에게 안집할 수 있도록 양식과 종자를 나누어 주어 들에는 노는 백성이 없었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드리고 생도들을 국고의 양곡으로 먹여 내외의 학교가 다 넉넉하여 도로써 예절과 풍속을 이루고 인재를 양육하였다. 대개 창칼을 버리고 예의를 강론하고, 말을 쉬게 하고 도를 논하는 의리가 깊어져 얻음이 있었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임금의 수레를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오자, 간신 최유(崔儒)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권력을 가진 자와 총애를 받는 자들에게 붙어서 공민왕의 폐위를 계책하여 황제의 명을 받고 실행하려 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표문을 받들고 원나라 수도에 가게 하였고 밀직제학 허망(許綱)에게 공을 보좌하게 하였다. 공이 길을 출발하여 서경에 가서 태조원묘(太祖原廟 : 別廟)에 가서 두 번 절하고, “우리 임금님이 복위 못하시면 신 이공수(李公遂)는 죽어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였다. 원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황후와 황태자가 교외로 위로하러 나오고, 인마(人馬)가 연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4월 3일 황제가 흥성궁(興聖宮)에서, 전서원사(典瑞院使) 완택독(完澤篤)에게 명하여 공을 불러들여 위로하게 하였다. 공이 예물을 바쳤다. 얼마 있다가 황후가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공에게 “공이 이미 마음을 다하여 우리 어머니께 효도하였으니, 이는 곧 나의 친형인데 감히 친형을 대하는 예로써 대하지 않겠소” 하였다. 공은 “주나라 강원(姜嫄), 대임(大任), 태사(太似)가 성인을 길러 집을 화하여 나라를 이루는 터전을 만든 것이『시경(詩經)』풍아(風雅)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쇠하게 되자 강후(姜后)가 죄 주기를 기다림으로써 선왕이 크게 깨닫고 스스로 근면하여 중흥의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한편 (패망을 스스로 부른 임금들은) 포(褒 : 주(周) 유왕(幽王)의 왕비), 달(? : 은(殷) 주왕(紂王)의 왕비), 여(呂 : 한(漢) 고조(高祖)의 왕비), 무(武 : 당(唐) 고종(高宗)의 왕비)는 종사(宗嗣)를 뒤엎고 제사를 그치게 하였으니, 그 덕의 아름답고 악한 것은 분명히 천년 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는 원나라 조정에 신하로서 형제의 의를 맺었습니다. 처음에 천자께서 장인이 되어, 뒤에 백여 년 동안을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 듯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기황후)로 말씀하자면 곧 주나라 태임과 태사가 되셨으니 삼한의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제 고려 국왕이 원나라에 심력을 다하고, 적을 정벌하여 국가를 위하여 공훈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내려 사방에 밝게 보여 장수들의 사기를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의(公義)를 폐하겠습니까. 병신년의 화(공민왕 5, 1356 :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처치한 일)는 실로 우리들이 교만하여 만족함을 알지 못한 소치이지, 왕의 죄는 아닙니다. 스스로의 허물을 모르고 공이 많은 임금을 폐하려 하시니, 조정에 사람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다른 날에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원컨대 전하께서 황제에게 잘 아뢰어 우리 임금을 복위하게 하시고 간신을 쫓아내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황후가 비록 그 말에 감동한 바 있으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공에게 덕흥군을 받들고 돌아가라고 하자, 공이 병을 칭탁하고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교서를 내려 “고려인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는 이공수를 제외하고 모두 왕을 따라가라” 하였다.
21일에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에 임명되자, 다음날 들어가 “신이 변방에서 생장하여 언어가 통하지 않고 중국의 예법을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은총을 무릅쓰고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지금 장수들이 밖에 포열해 있는데, 공을 세운 자에게도 상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혹시 천하가 이것을 가지고 폐하를 비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하고 27일에 부임하자, 자정원(資政院)에서 명령을 받들어 음식을 성대하게 베풀어 동료들에게 향응하였다. 종묘에 제사지내는데 공이 두 번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예법을 좇아 행하니 보는 자가 모두 공경히 대하였다. 이에 공의 할아버지 제주공(祭酒公)에게 중봉대부 집현학사(中奉大夫 集賢學士)로, 아버지 규정공(糾正公)에게 자선대부 전서원사(資善大夫 典瑞院使)로 각각 추증하였다. 할머니 정씨와 어머니 송씨 그리고 부인 김씨는 모두 농서군부인(?西郡夫人)으로 봉하였다. 황태자가 황제의 명으로 공과 같이 만수산(萬壽山)의 광한전(廣寒殿)에 올라갔다. 태자가 전액(殿額)에 쓰인 인지(仁智)의 뜻을 물었다. 공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물건을 분별하는 것을 지(智)라고 합니다. 제왕이 이 두 글자를 가지고 사해를 통치하면 만대까지도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하였다.
광한전 안으로 들어가 황태자는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가리키면서 “노인은 일찍이 이와 같은 기둥을 본 일이 있소” 하였다. 공은 “신이 듣건대 제왕이 정치를 할 때 어진 정치를 베풀면 그 거처하는 집이 비록 썩은 나무일지라도 금과 옥의 견고함과 같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금석의 견고함도 도리어 썩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광한전에서 나와서 태사(太師)인 왕가노(王家奴)와 소보(少保)인 백살리(伯撒里)에게 자리를 주고 공에게 명하여 그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 첨사(詹事)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가 서서 비파를 타자 태자가 이를 얻어 비파를 타다가 곡조를 이루지 못하자 놓으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았더니 잊어버렸다” 고 하였다. 공이 즉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백성이 근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면 비파 위에 한두 곡조를 잊었다 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태액지(太液池)의 배 위에 있을 때 태자가 공이 말한 것을 아뢰자, 황제가 “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사람임을 알았다. 너의 외가에는 오직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하루는 황후가 그의 형 평장사의 집이 화를 입은 연유를 물었다. 공은 “재물을 탐하여 원망이 쌓여 모이면 화를 면하는 자가 드문 것이니, 형세의 격화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요 왕의 마음도 아니며 왕의 죄도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환관 박불화(朴不花)가 황후에게 밀고하기를 “이모(李某)는 다만 그 임금만을 위하여 있는데 어찌 그 친척을 생각하겠습니까” 하자, 황후는 오랫동안 공을 불러보지 않았다. 덕흥군이 이미 요양로에 이르자, 최유가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원나라 수도에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이 혹시 중간에 변해 버린다면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하고, 이에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와 박불화(朴不花)에게 뇌물을 많이 주고 기필코 공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 그의 서장관 임박(林樸)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부모도 없고 또 후사도 없으며 벼슬도 또한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시 돌아보고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요 결코 저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독로첩목아와 박불화 두 사람이 들어가서 아뢰었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패라첩목아(?羅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와서 승상 삭사감(?思監)을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를 대신(臺臣)으로 삼아 나쁜 폐단을 낳은 정치를 개혁하면서 “고려의 왕이 공이 있고 아무 죄가 없는데도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를 먼저 다스려야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왕위를 회복하게 하고 최유를 붙잡아 본국으로 보냈다. 공 또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제화문(齊化門)을 나와서 노비(蒼頭)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고 따르는 자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더할 것이 다시 있겠는가” 하였다. 오는 길에 말이 피곤하여 노비가 화살 한 개로 한 묶음의 콩을 사서 먹였다. 공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왜 궁한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았느냐” 하고 면포를 잘라주어 그 값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 사람은 없고 양곡만 들에 쌓여 있으므로, 공이 조 한 묶음의 값이 면포 몇 척인가를 묻고, 그의 말대로 하고, 이것을 (천의) 양쪽 끝에 써서 조를 쌓아둔 가운데에 놓아두었다. 수종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말을 가지고 온 자가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가져 갈 것이니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값을 보상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도 진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10월 25일에 서울로 돌아와 합문(閤門)에 나가 고하기를 “사명을 받들고 갔던 신(臣) 이공수가 돌아 왔습니다” 하고 조금도 그 어려웠던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다. 임금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 때에 성균관에서는 공역이 시작되었는데, 공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황제가 내린 금대를 풀러 이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도왔다. 취성군(鷲城君 : 신돈)이 국권을 잡게 되자 자못 공을 꺼려하였고 공도 또한 자신의 성만(盛滿)함을 스스로 경계하고 집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하였다. 공이 원나라 서울로 가자, 4월 공에게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都僉議左政丞 判軍簿司事)에 임명하였다. 다음해 10월 17일에 다시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領都僉議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로 승진되었고, 25일 본국으로 돌아왔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 6월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로 인하여 일찍이 하루도 조정에 앉아 총재의 사무를 행한 일이 없어 사람들이 자못 이를 한하였다.
아! 공의 밝고 정밀한 지혜와 신중한 처사는 한때의 나이와 덕이 높은 대신들 중에도 그와 견줄 사람을 보기가 드물었다. 과단성 있고 강하고 의연하여 어떤 형세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풍류가 조용 단아하며 산수를 좋아하는 아취는 능히 스스로 가릴 수 없는 데에 이르렀다. 덕수현(德水縣)에 별장을 두고 스스로 남촌(南村)선생이라 하였으며,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동년(同年)의 여러 사람을 초청하여 그 가운데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었으며, 혹 문생이 가서 뵈면 언제나 술에 취해 돌아가게 하였다.
부인 김씨는 신라 김부(金傅)대왕의 13대 손인 삼중대광 의흥부원군(三重大匡 義興府院君) 김상기(金上琦)의 딸이다. 어진 행실이 있었고 능히 군자에 짝할 만 하여, 종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인자함을 칭송한다. 병오년(공민왕 15, 1366) 5월 초1일 병으로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부음을 아뢰니 임금이 애도하여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내리고 장례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관에서 부담하게 하여 24일에 별장 서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공은 자녀가 없어 족인의 딸을 길러 성균생원 안속(安束)에게 출가시켰다. 아아! 이씨의 8대가 공에 이르러서 더욱 창성하였는데 전주공의 덕과 명망으로 이에서 그친 것은 하늘이 진실로 그 지위를 아낀 것이요, 규정공이 착한 일을 쌓아 뒤를 이으니 이것으로서 문충공의 탄생의 보답이었다. 문충공이 더욱 그 문호를 창대하게 하여 이미 그 선조를 빛나게 하였으나, 그 뒤가 없으니 참으로 저 창망한 하늘이 끝이 없는데 사람이 잠시 그 사이에 붙어 있음을 알겠도다.
아아! 슬프다. 공의 이름은 공수(公遂)이며, 자는 그 사는 곳을 따라 형제(衡齊)라 하였다. 공이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에 이색(李穡)이 따라 갔고, 성균관에서 학업을 받아 문과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에 올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공의 은혜이다. 명하는 글을 어찌 사양하리요.
명(銘)에 이르기를,
삼동에도 푸른 것은 저 소나무의 곧음이요.
백번 녹여도 강경한 것은 그 강철이 매우 좋음이로다.
아름답다 문충공이여. 조정에서 수응(酬應)하니,
샘물같이 차가움이 있었고 바람같이 온화함이 있었다.
섬기는 임금에게 충절을 다하여 황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었고,
공을 이루고도 그 자리에 거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 의로움을 탄복하였다.
태실(太室)에 배향하여 다 그 길함을 같이 하였으니,
공로가 많은 것이 아니요 그 덕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비록 자손은 없으나 이 무덤에 영구히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