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지식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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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흥(慶與) 녹보파호비(鹿堡破胡碑) 오호라, 이곳은 고 충무(忠武)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변방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다. 만력(萬曆) 정해년(선조 20, 1587년)에 공께서 조산 만호 겸 녹보둔전관(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왔다. 변방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공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돌아가는 것을 맞이하여 포를 쏘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크게 두려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후인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 선조 임진년(선조 25, 1592년) 왜구가 대거 우리 강토로 쳐들어오자 임금이 수레를 타고 파월(播越 : 임금이 도성을 피해 피난함)하매 종묘사직이 무너질 형편이었다. 공이 맨 먼저 기병(起兵)하여 적을 토벌함에 당포(唐浦)에서 처음 적을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에서 두 번째로 격파하고 명량(鳴梁)에서 세 번째로 격파하였다. 공이 마침내 전선에서 목숨을 잃긴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꺾여 다시 떨치지 못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유지된 것은 실로 공의 덕택이다. 공의 충성(忠誠)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공렬(功烈)은 이정(彛鼎 : 조정에서 제사에 쓰던 예기(禮器))에 새길 만하니, 작은 한 조각의 대(臺)는 공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한 것은 소관(小官)부터 시작해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공이 마침내 불세출의 공훈을 수립한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는지라 사라져 없어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5대손 관상(觀祥)이 이제 관북절도사(關北節度使)가 되어 천리 길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음기(陰記)를 써 줄 것을 요구하니, 오호라, 옛적에 이른바 물길은 차마 없어지게 놓아둘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가의대부(嘉義大夫)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명정(趙明鼎)이 기술하다. 임오년(영조 38, 1762년) 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