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지식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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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옛날 당나라 왕실이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자 사방이 호응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투항해왔지만, 동이(東夷)는 복종하지 않고 청해(靑海)를 점거하여 나라를 유지하였다. 공(公)은 올바른 법도에 뜻을 두었고 다가올 일을 미리 아는 지혜가 있어서, 저 백성들을 버리고 천남생(泉男生)을 따라와 교화를 받들었고, 황제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동쪽으로부터 귀순해오니, 서경(西京)을 본향으로 삼고 적현(赤縣)에 이름을 올렸다. 증조(曾祖)는 고보(高寶)로서 본주(本州) 도독(都督)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고방(高方)으로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고렴(高廉)으로 당나라에서 천주(泉州) 사마(司馬)로 추증되었다. 모두 삼한(三韓)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현달하였고, 동이(東夷)의 이름난 현인(賢人)으로 계속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이렇게 공(公)과 후(侯)가 필시 반복되는 것은 대대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리라. 공(公)은 솥을 들어 멜 정도로 굳센 재질을 지녔고, 산을 뽑아낼 만큼 장한 기운을 품었으니, 그의 용맹을 높이 사 요동(遼東)을 토벌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공(公)은 과연 고구려의 옛 신하로서 형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평양(平壤)을 크게 격파하는 데에 최선봉(最先鋒)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공을 세워 의성부(宜城府)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 총관(摠管)에 제수되었다. 아울러 공(公)의 지혜와 용기를 사서 행군(行軍)을 주관하도록 따로 주천(奏薦)되었다. 이리하여 변방에서 그의 자취를 두려워 하였고, 그가 쏜 화살이 돌다리에 깊숙이 박혀 있으니, 여러 번 발탁되어 관직과 관품을 제수받았다. 또 홍도(弘道) 원년(683)의 유제(遺制)를 받들어 외관(外官)의 등급을 하나씩 높여주게 되자, 관직은 그대로인 채 관등만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올랐다. 한 번 정벌을 따라 나서면 10년이 되어서야 돌아와도, 충성스런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힘써 수고함에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수공(垂拱) 2년(686) 2월에 칙명을 받들어 신무군(神武軍) 통령(統領)으로 파견되었고, 3년(687) 4월에 적(돌궐)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여 계주(薊州) 북쪽에 그의 명성을 날렸고 연산(燕山) 남쪽에서 그의 업적을 우러러 보았으니, 곧이어 우옥검위(右玉鈐衛)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되었다. 또 영창(永昌) 원년(689)에 칙명을 받들어 여러 주(州)에서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를 선발하였고, 그 해 7월에는 다시 칙명을 받들어 낙주(洛州)의 병사(兵士)를 선발하였으며, 곧 신평도(新平道) 좌삼군(左三軍)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정벌에 나섰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월 9일에 제서(制書)의 은택(恩澤)을 받아 좌표도(左豹韜) 행중랑장(行中郞將)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그의 집안은 왕실 가문이었으니 먼저 곽거병(霍去病)의 반열을 따른 것이요, 벼슬은 표도위(豹韜衛)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염파(廉頗)가 조(趙)나라에서 등용된 것과 같음이로다. 생각컨대, 공은 오랫동안 장한 절개를 품었고 일찍이 웅대한 계책을 짊어졌구나. 두헌(竇憲)이 연연산(燕然山)에 공적을 새겼어도 그의 원대한 방략에 수치를 느꼈고, 마원(馬援)이 교지(交阯)의 동고(銅鼓)를 녹였어도 그의 크나큰 재주에 부끄러워 하였다. 이미 천년이 되어도 뒤따르기 어려운 공적을 세웠으니 백년이 지난들 쉽게 사라지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돌이 부러지는 슬픔을 맛보게 되었고, 홀연히 태산(泰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도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10월 26일에 병을 얻어 신도(神都) 합궁현(合宮縣)에 있는 자택에서 운명하니 이 때 나이 49세였다. 아, 덧없는 인생은 머물지 않아 현명한 사람이 멀리 떠나버리니, 슬프고 슬프구나. 대주(大周) 천수(天授) 2년(691) 신묘년(辛卯年) 10월 18일에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무덤 속이 어둡고 깊으니 마침내 다시 볼 기약이 없고, 상여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니 다시 말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졌구나.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을 탄식하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뀔 것을 두려워 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명(銘)으로 삼고자 한다. 옛날에 연(燕)의 보배가 되었다가 이제 진실로 한(漢)의 보물이 되었구나. 대당(大唐)의 날랜 장수였고 무주(武周)의 장한 신하였도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도다. 넉넉함이 있다고 칭송되니 대대로 인재가 끊이지 않았도다. 이것이 첫째이다. 엄정하고 공경스럽도다 용맹스런 장부여, 높고 뛰어나도다 훌륭한 문장이여. 어릴 때부터 특출나게 뛰어나더니 북방에서 충성스러움과 올바름으로 드날렸도다. 귀신과 같이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려 거짓을 버리고 천자(天子)께 귀순하였도다. 종횡으로 기개를 떨치니 어찌 곽거병(霍去病)을 부끄러워 하겠는가. 이것이 둘째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 출정하여 강한 오랑캐 장수들을 목베었도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전장에 나가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구나. 어찌 활과 말뿐이겠는가 높은 지략(智略)의 덕택이라. 그에게서 용맹과 강건함을 취하는 것은 썩거나 마른 나무를 꺾어내는 것만큼 쉬운 일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개선한 지 오래지 않았고, 전장에서 돌아온 말이 아직 가까이에 있구나.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아직 아름답고, 즐거움도 미처 그치지 않았도다. 갑자기 고질병에 걸려 혼백이 무덤 위에 날게 되었구나. 흰 수레 나아가고 붉은 깃발 홀연히 세웠도다. 이것이 넷째이다. 무덤 길 쓸쓸하고 저승 길 아득하구나. 나무는 비통해하고 바람이 이는데 산은 차갑고 날이 저무는도다. 친척들이 구슬피 우니 나그네도 슬퍼하는구나. 한 번 무덤 문이 닫히니 천년으로 기약하도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신묘(辛卯) 2월. [출전 : 「고구려 유민 고현 묘지명」『박물관연보』10, 서울대(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