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독문/해석문해동 백계산2 옥룡사3 증시 선각국사4(贈諡 先覺國師) 비문과 아울러 서문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5 수 대위(守 大尉)6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자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 형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신 최유청7(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 刑部事 監修國史 上柱國 臣 崔惟淸)이 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조산대부8 상서 예부시랑 한림시독 학사 지제고 사자금어대 신 정서9(尙書 禮部侍郞 翰林侍讀 學士 知制誥 賜紫金魚袋 臣 鄭叙)는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의종 임금10께서 보위를 이은지 4년째11되던 10월 신유에, 臣 惟淸에게 조칙으로 명하여 이르기를, 선각국사는 도덕이 고매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업도 가장 많아서 우리 조종12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계(法階)를 봉증(封贈)하였다.13 그러므로 국가에서 대사에게 존중함이 지극하였다. 그의 성덕과 대업을 아직 비문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짐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14 인고(仁考)15께서이미 경에게 命하여 비문을 찬술케 함은 그것은 곧 국사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표한 것이다. 신이 왕명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물러나와 그 행장 자료를 살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얻고는 차례로 기술하였다.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16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17의 서얼손18 이라고도 하였다.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19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20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21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태어난 후, 유아시기부터 일반 아이22들보다 특이하였다. 비록 어려서 희희(嬉戱)23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24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25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26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27 월유산28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29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30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문수의 妙智와 보현의 玄門에 모두 契入하여 남음이 없었다. 百千이나 되는 학도들이 모두 해안31하여 神聰이라 하였다. 문성왕32 8년33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34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35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36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37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38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39 허중(虛中)40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41을 완상하면서 유수(幽邃)한 곳과 명승지를 찾아42 선지식을 친견하고 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43 때로는 운봉산44밑 동굴45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46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47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尊仰하였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스님께서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48, 연좌(宴坐)49하여 망언50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마치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 듯51,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세수할 때에는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수발하며52, 출입할 적에는 錫杖과 신발을 준비하는53 등 정성껏 시봉하였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명을 넘었다. 차별적인 모든 根機들에게 一雨로 널리 윤택하였으며54, 목격(目擊)55 현장에서 신비하게 密授하여 빈손으로 나아가서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56 헌강왕57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禁中58으로 맞이하고 처음 보는 초면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임금의 마음을 開發토록 조언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59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 원년(光化 元年)60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이다. 사부대중61들이 슬피 통곡하니 마치 사모하는 듯, 또는 넋이 빠진 바보와도 같았다. 드디어 神座를 옮겨 탑을 절 북쪽 언덕에 세웠으니, 유명을 준수한 것이다.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62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63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64 박인범65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66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에 자리잡지 아니하고67, 지리산 구령68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座下에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弟子는 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69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70들이 사도촌71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72, 더욱 음양오행의 술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73과 옥급74 등 유수한 비결75들을 모두 흉중76에 담았다. 그 후 신라의 政敎가 침쇠(寢衰)하여 국가 위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特起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77으로 갔더니, 그 때 우리 세조78께서 郡方에서 거택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의 문전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王者가 출생할 곳이언만 다만 經始하는(살고 있는 사람) 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때 마침 靑衣童子가 이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세조에게 전하였다. 세조는 급히 나와 스님을 집 안으로 迎入하여 그 謀策과 改營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되, "2년 후에79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封하여 세조에게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80 그러나 나이 장실(壯室)81에 이른 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하였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하였는데, 唐나라 건부 2년82에 해당된다. 4년83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과연 前第84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구포(寇暴)85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區宇에 나아갔으나86, 공손히 신성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 그 까닭은 반란의 무리를 무찌르고, 정의로 돌아가서 국민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여 壽域에 오르도록 하였다.87 이와 같은 큰 위업88과 아름다운 덕89이 未來際가 다하도록 끝없이 傳할 것이며, 비록 다시 하늘이 有德한 이를 도우며90, 백성들은 모두 인의를 지켰다. 그러나 그가 계성(啓聖)91하여 화원(化元)92을 기약한 것은 결정코 천명을 유수(幽數)93에서 이룩하였으니, 그 원인은 모두 우리 스님으로부터 發起되었다. 대개 功烈이 우뚝하고 혁혁함이 이처럼 성대하므로 마땅히 포상하고 추모하며 존숭하였다. 그리하여 현종94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95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96조에 이르러 열성97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98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99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100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臣이 생각나는대로 말하건대, 대저 제왕이 장차 일어남에 있어 그 威靈과 氣燄이 반드시 먼저 物心에서 動蕩함이 있게 되므로101 높은 재주를 가진 이와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들이 전연히 일어나되,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를 따르기도 하여 起用함이 되었다. 예컨대 국사께서 태조에 대하여 陰助한 사실은 심히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먼저 태조가 태어날 것을 미리 알았으며102, 그가 말한 예언들이 그의 죽은 후에도 적중하였다.103 그의 신비한 부작이 冥契한 것은 不可思議함이 있었다. 오호104라! 스님의 도덕은 극치에 이르러 佛祖와 더불어 합일하였으며, 자취를 나타낸 것은 마치 장자방105이 神으로부터 兵書를 받은 것과 같고, 釋寶誌公 스님이 징조가 나타나기 이전에106 예언한 것은107 一行禪師108가 음양 術數에 정통한 것과 같은 것이다.109 스님께서 전하신 陰陽說 數篇110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의 지리가들이 모두 이것을 依宗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지난 세상 나타나신 모든 부처님! 無上甚深 微妙法을 연설했으니 그 법문은 文字로써 다툴 수 없고 聞思修인 三慧로도 얻지 못할새 ① 直指111人心그 자리는 초연한 境地 一念卽是 千劫112이라 長短이 없네! 위대하신 고려조의 우리 國師여! 禪悅世界 우유하게 自在하시네.113 ② 達磨宗旨 禪思想을 善學하시어114 眞空이나 空아니고 有도 아닐새 투철하신 眞正法眼115 터득하시고 四通116으로 자재하신 六神通117이여! ③ 無碍自在 확철하온 그 여력으로118 陰陽數術 兼硏하여 교화하시다. 시서(蓍筮)119로써 점복함을 依支치 않고 사건전에 미리 알아 적중하도다.120 ④ 후삼국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며121 天의 명령 아직까지 닫혀 있으나 오래전에 지나간 일 모두 알았고 미래일을 미리 알아 예언하였다. ⑤ 책을 지어 王隆에게 전해 주면서122 고려국이 개국됨을 예언하였다. 周文王이 周나라를 건국하듯이123 후삼국을 통일함이 손 펴듯 하다. ⑥ 지리산속 구령에서 異人을 만나124 地理書인 金壇玉笈 전해 받았다.125 그로부터 각종 음양 연구하여서 上通天文 下達地理 自在하였네! ⑦ 장자방과 도선국사 때는 다르나126 두 사람이 예언함은 다르지 않네! 위대하신 그 공적은 비길 데 없고 산하처럼 높고 깊어 다할 수 없다. ⑧ 열반한 후 오늘까지 삼백년이나127 바람 불고 물 흐름은128 다르지 않네129 높은 德을 瞻仰하는 四部衆이여! 그 도덕이 높고 높아130 하늘 같도다.131 ⑨ 偉業行狀 돌에 새겨 舊祠132에 세워 천년 만년 지나도록 보여주려고 산신령인 山君133에게 부탁하노니 길이 길이 수호하여 게을리 마오. ⑩ 天德 2년134 歲次 庚午 7월 乙亥 9일 癸未에 비를 세우고, 영오(穎悟)135 三重大師 臣 處實136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陰記) 선각국사비 음기(先覺國師碑 陰記)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137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138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139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140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141의 문무(門廡)142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143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144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145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146께서 즉위함에 이르러147 난적148을 잔제(剗除)하고 百度149를 정돈하여, 유신150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151 주지 중대사 지문152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153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154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155 서승(署承)156 박봉균157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158 설호정159 이양정160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161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162 한언방163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164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165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166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167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168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169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170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파의 문손을 찾아, 이른바 正孫 10인을 아래와 같이171 송림사172 주지 중대사 형균173 현갑사174 주지 중대사 민언175 중대사 지효176 중대사 지연177 중대사 언선178 중대사 종순179 중대사 처령180 대사 혜온181 대사 혜자182 대사 혜의183 금자(金紫)184 광록대부(光祿大夫)185 수사공 중서시랑 평장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예부(守司空 中書侍郞 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禮部事) 치사(致仕) 신(臣) 최유청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하다. 癸巳 6월 14일 판허(判許)186와 아울러 法孫들이 傳持하고 있는 4個寺187도 새겨둔다. 문인 옥룡사 주지 중대사 臣 지문이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우고, 보현사188 주지 대오 중대사 신 기준189은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며, 문인 참학 신 정충190이 어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광양현(光陽縣) 북쪽 약 20리 지점. 진산(鎭山)으로서 산두(山頭)에 바위가 있고, 그 암하(岩下)에는 샘이 있었다. 기도처로 되어 있는데, 재계(齋戒)가 불성(不誠)하면 그 샘물이 말랐다고 한다. ↩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 백계산(白雞山)에 있었는데, 864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이 절에 958년에 세운 「동진대사 보운탑비문(洞眞大師 寶雲塔碑文)」과 1150년에 건립한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先覺國師 證聖慧燈塔碑文)」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0, 광양현 불우조 옥룡사 참조. ↩
827∼898. 도선국사의 시호이니, 고려 인종(1122∼1146)이 추증하였다. 신라 효공왕(897∼912)이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특증(特贈)하였으며, 고려 현종(1009∼1031)이 대선사란 법계를 추증하고, 숙종(1095∼1105)이 왕사로 책봉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로 진봉(進封)하였다. 저자는 「松岳明堂記」,「道詵時堂記」,「道詵實記」,「道詵秘記」등이 있다. ↩
익성(翊聖)은 翼星이라고도 하니, 황제의 노부(鹵簿)에 사용하던 삼각형모양의 의장기의 하나. ↩
三公 중의 하나이니, 대위(大尉 : 兵事를 맡은 벼슬)·사도(司徒 : 六卿의 하나이니, 교육을 맡아보는 벼슬)·사공(司空 : 토지와 民事를 맡은 벼슬)이고 삼사(三師)는 대사(大師)·대부(大傅)·대보(大保)이다. 『高麗史』권76, 백관 1 태조 2년조 참조. ↩
1095∼1174. 고려 무신. 이름은 유청(惟淸), 자는 직재(直哉). 시호는 문숙(文淑). 금주(金州) 출신. 본관은 창원. 석지(奭之)의 아들. 어머니는 안씨(安氏).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 여러 관직을 거쳐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례부사(守司空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를 역임하였다. 1174년(명종 4) 12월 15일 사망. 1175년 1월 장사를 지냈다(「최유청묘지명」). ↩
조산랑(朝散郞)이라고도 함. 고려 때 문관의 품계. 무산계로 문종 때에 둔 종5품 下로 1308년에 폐지하고, 1365년 종4품 하(從四品 下)로 올렸다가 1362년에 폐지. 1369년 종4품 상(從四品 上)으로 하였다. 「개성 흥왕사 대각국사묘지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註 4) 조산대부조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註 15) 조산랑조와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註 5) 조산대부조 등 참조(『고려사』권77). ↩
고려 무신. 이름은 서(叙). 호는 과정(瓜亭). 본관은 동래. 음보(蔭補)로 내시랑중에 이르렀다. 공예태후(恭睿太后 : 인종비))의 여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문장이 뛰어났다. 1151년 폐신(嬖臣) 정함·김존중의 참소로 고향인 동래로 장류(杖流)될 때, 의종으로부터 곧 소명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 오래도록 소명이 없자, 연군의 정을 가요로 읊었으니, 이것을 삼진작(三眞勺) 또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고 한다. ↩
고려 제18대 의종(毅宗) 임금을 지칭함. ↩
의종이 왕위를 이은지 4년째 되던 해이니, 1150년이다. ↩
고려 조종(祖宗)을 가리킴. ↩
여러 조대(朝代)의 임금들이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법계와 법호를 진가(進加)하였으니, 대개 다음과 같다. 신라 효공왕이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 고려 현종이 대선사(大禪師), 숙종이 왕사(王師)로, 인종이 선각국사로 각각 진증(進贈)하였다. ↩
아직까지 국사의 행적을 비문에 새겨 전하지 못한 것은, 짐에게 있어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는 말. ↩
의종의 아버지인 인종을 지칭함. ↩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 백제 때는 월내군. 신라 경덕왕이 영암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선종 14년(995)에 낭주 안남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현종 19년(1028)에 강등하여 영암군이 되었다. 조선이 그대로 따랐다. ↩
신라 제19대 태종무열왕. ↩
庶孽子孫의 준말이니, 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公羊, 襄 27에 庶孽은 衆賤子라 하다. ↩
만삭이 되어 분만할 때까지라는 뜻. ↩
葷은 악취가 나는 채소. 곧 오신채(五辛菜)이니, 매운 맛 나는 나물로 파(葱) 마늘(蒜) 달래(薤) 부추(菲) 흥거(興渠) 등 다섯 가지의 자극성 있는 채소이고, 성(腥)은 누린내 나는 날고기이다. 오신채에 대해서는 『범망경』 卷下 48輕垢戒 中 第五 食五辛菜條에 "若佛子여 不得食五辛이니 大蒜(마늘) 茖葱(부추) 慈蔥(파) 蘭蔥(달래) 興渠(한국에는 없음)"라 하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주 161) 腥條와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주 31) 血條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1) 주 42) 辛條와 「장단 오룡사 법경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1) 주 11) 辛條 등 참조. ↩
① 가까이 하지 아니하다. ② 먹지 아니하다. ↩
해제(孩提) 또는 해아(孩兒)라고도 함. 어린 아이. 提는 손을 잡고 이끄는 것. 孩는 처음으로 웃을 줄 아는 나이, 곧 2, 3세 때. 한유의 「符讀書城南詩」에 "兩家各生子 提孩巧相如"라 하다. ↩
유희(遊戱)라고도 함. ① 기꺼이 유희하는 것. 아이들이 친구와 노는 것. ② 어머니와 함께 뛰노는 것. ③ 유희하는 것. 대개 7살에서 9살 안팎의 어린 아이. ↩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이란 뜻이니, 훌륭한 스님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는 뜻. ↩
조숙(早熟)과 같은 뜻. 나이는 어리지만 일찍이 지각이 트이거나, 학업등이 성취됨. 만성(晩成)의 對. 熟은 早의 뜻. ↩
① 기술과 예술 ② 기능과 예능. ↩
삭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는 뜻. ↩
구례 화엄사가 있는 산 이름. 지금은 통칭 지리산이라 하나, 그 당시는 화엄사 부근 산을 月遊山이라고도 하였다. ↩
『화엄경』을 지칭함. ↩
1년도 채 되지 아니하였다는 말. ↩
해시(駭視)와 같은 뜻. 재주가 뛰어나고, 학업 진척이 남과 달라서, 보는 사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는 말. 양수(楊修)가 「答臨淄侯」에 "觀者駭視而拭目 聽者傾首而竦耳"라 하다. ↩
?∼857. 제46대 임금. 재위 839∼857년. 이름은 경응(慶膺).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妃는 위흔(魏昕)의 딸 소명부인(昭明夫人). 재위 기간 중 자주 모반 사건이 일어나 혼란한 시대를 다스렸다. 846년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반란에는 염장(閻長)을 보내어 이를 평정했다. ↩
846년 병인임. ↩
교법(敎法)을 여의고, 스스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는 말이니, 단좌정심(端坐靜心) 곧 참선하는 것을 뜻함. ↩
785∼861. 속성은 朴氏. 자는 체공(體空). 시호는 적인(寂忍). 경주 출신. 814년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839년 귀국하여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 대안사에서 회상(會上)을 열어 9산 선문(九山 禪門) 가운데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
735∼814. 남악하(南岳下)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휘는 지장(智藏). 호는 서당(西堂). 건화(虔化) 출신. 속성은 요씨(廖氏). 8살 때 출가. 백장회해(百丈懷海)와 남천보현(南泉普願)과 동문이다. 마조의 장두백(藏頭白) 해두흑(海頭黑)이란 말은 회해(懷海)와 함께 걸출(傑出)한 제자로써 이 두 스님을 마조 문하(馬祖 門下)의 2대사(二大士)라고 일컫고 있다. 여기에 보원(普願)을 加하여 3대사(三大士)라고 한다. 814년 4월 8일 세수 80세, 법랍 55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헌종이 대선교선사(大宣敎禪師) 또는 대각선사(大覺禪師)라고 시호를 내렸다. 『宋高僧傳』권10, 『祖堂集』권15, 『景德傳燈錄』권7 등 참조.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한 산. ↩
옷 뒷자락을 약간 끌어올리는 것이니, 공손한 태도로 예배하는 것. 「산청 단속사 대감국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주 104) 衣之禮條 참조. ↩
불립문자(不立文字)인 선종의 종지(宗旨)를 지칭함. 곧 화엄의 상설(常說)과 편설(徧說), 그리고 낭혜화상 무념(無念)의 무설토(無舌土)와 화엄경의 국토설(國土說) 등이 모두 선사상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
무중(無中)과 같은 뜻. ↩
천류산석(泉流山石)의 준말. 샘과 돌이나, 전하여 산수의 경치를 뜻함. ↩
유수한 곳을 답사하고, 아름다운 명승지를 찾아다녔다는 뜻. ↩
조금도 해태(懈怠)하거나, 안식을 구한 적은 없었다라는 말. ↩
구름이 산 봉우리까지 자욱히 덮힌 산. ↩
자연 동굴이니, 토굴이나 석굴. ↩
태백(太白)과 같은 뜻. 희고 큰 바위. 곧 산정(山頂)의 큰 바위 밑에서 토굴을 맺고 정진한다는 말. ↩
환구(寰區)와 같은 말. 봉건시대 때 천자의 직할구역이나, 전하여 광범한 경계내(境界內), 또는 천하, 천지의 뜻. ↩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삼으려는 뜻. ↩
고요한 곳에 앉아 정진하는 것. 곧 좌선의 뜻. ↩
묵언(默言)과 같은 말이니,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는 뜻. ↩
양고기가 있는 곳에는 누린 냄새에 따라 많은 개미가 모여든다는 뜻이니, 도덕이 높은 스님에게 스스로 많은 문법자(問法者)가 찾아오는 것에 비유하는 말. ↩
세수할 때,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담은 컵 등을 수발하는 것이니, 곧 스님을 시봉(侍奉)한다는 뜻. ↩
외출할 때, 석장(錫杖)과 신발을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니, 이것도 역시 스님을 시봉(侍奉)한다는 말이다. ↩
마치 비가 내려서 두루 초목을 윤택하게 하듯, 스님께서 찾아오는 모든 청법자(請法者)들에게 권태로움과 차별심(差別心)이 없이 두루 그들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준다는 데 비유한 뜻이니, 『法華經』藥草喩品의 ‘一雨三草’에서 온 말. 『法華經』권3, 藥草喩品에 “迦葉 當知 如來 是諸法之王 若有所說 皆不虛也 於一切法 以智方便 而演說之 其所說法 皆悉到於一切智地 云云 迦葉 譬如三千大千世界 山川豁谷 土地所生 草木叢林 及諸藥草 種類若干 名色各異 密雲彌布 遍覆三千大千世界 一時等澍 其澤普洽 云云 雖一地所生 一雨所潤 而諸草木 各有差別”이라 하다(大正藏 권9, p.19 中段). ↩
目擊而道存矣 亦不可以容聲矣의 준말. 눈으로 직접 현장을 보았다는 말이니,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임을 뜻함. 『장자』전자방(田子方)에 "子路曰 吾子 欲見溫伯雪子 久矣 見而不言 何耶 仲尼曰 若夫人者 目擊而道矣 亦不可以容聲矣"이라 하다. 예컨대 미국의 사상가이며 석학인 에머슨(Emerson, 1803∼1882)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영국의 사상가 카알라일(Carlyle, 1795∼1881)과 처음으로 반갑게 만나,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의기가 상통한 것 등이 모두 석존(釋尊)과 가섭(迦葉)이 이심전심 파안미소(以心傳心 破顔微笑)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장단 오룡사 법경대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1) 주 41) 目擊之存條 참조. ↩
스님을 찾아갈 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돌아올 적에는 마음에 가득히 채워서 돌아간다는 말. ↩
헌강(憲康)이라고도 함. 신라 제49대 임금. 재위 875∼886.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 경문왕의 아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문치에 치중하며,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푸는 등 불교를 독신하였으나, 재위 중에 처용무가 크게 유행.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를 이룩했으나, 이때부터 점차 신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
궁중(宮中)을 지칭함. ↩
옥룡사를 가리킴. ↩
신라 효공왕 2년(898). ↩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준말이니,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信男)·우바이(信女). ↩
선각국사의 문인(門人)이나, 전기는 미상하다. ↩
① 빛나는 행적 ② 위대하고 큰 업적. ↩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이니, 한림원 집사시랑(執事侍郞)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이다. 신라시대에는 한림대(翰林臺)였으나, 880년 무렵 서서원(瑞書院)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문학기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
신라 학자.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했고, 시문에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귀국 후 한림학사·수예부시랑(守禮部侍郞) 등을 역임. 898년 효공왕의 명으로 도선(道詵)의 비문을 지었다. 『동문선』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 ↩
도선이 입적하던 898년에 효공왕이 박인범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고려 의종 4년(1150)까지 비를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인범이 지은 비문은 사장되었고, 의종이 최유청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 ↩
도선국사가 아직 옥룡사를 창건하기 이전이란 말. 卜은 절 터를 잡는다는 뜻. ↩
지리산에 있는 고개 이름. ↩
만약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지리설을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훗날 남해 바닷가로 오라는 뜻. ↩
토박이. 그 지방에 사는 사람. ↩
어떤 이인(異人)이 남해 바닷가 모래 위에서 도선에게 산천의 순역(順逆)한 형세를 그렸던 곳의 마을. ↩
도선국사가 이인(異人)으로부터 산천 순역((山川 順逆)에 대한 그림을 그려서 보여줌으로부터, 지리에 대하여 활연히 통달하였다라는 말. ↩
신선이 거하는 장소. 곧 선경(仙境). 신선을 모신 단. 『茅君內傳』에 "洞天三十六所 乃眞仙所居 第八句曲山之洞 周廻一百五十里 名曰 金壇華陽之天"이라 하다. ↩
옥을 칠한 책 상자. 육유(陸游)가 지은 『老子道德古文跋』에 "玉笈藏道書二千卷"이라 하다. ↩
깊고 오묘한 비결 책. ↩
흉중(胸中)이니, 마음에란 뜻. ↩
개성을 지칭함. ↩
고려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왕륭(王隆)의 시호. ↩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나기 2년전이니 875년임. ↩
이 책을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임금(고려 태조)에게 올린다는 말. ↩
30세 전후를 지칭함. ↩
唐의 희종 연호이니, 신라 헌강왕 1년(875). ↩
건부(乾符) 4년이니, 877년임. ↩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며 또한 태어난 곳이니, 왕이 된 후 희사하여 광명사가 되었다. ↩
궁예와 견훤을 지칭함. ↩
비로소 구우(區宇)를 지었다는 뜻이니, 통치구역을 가졌다는 말이니, 곧 삼국을 통일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 ↩
백성들로 하여금 수역(壽域)에 오르도록 하였다라는 뜻. 수역(壽域)이란 ① 임금이 寇暴한 자를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어 잘 다스려진 태평성세의 세상. 곧 전쟁이나 질병 또는 흉년으로 요사(夭死)하지 않고, 인수(仁壽)를 누릴 수 있는 지역. ② 수휼(壽穴)·수역(壽域)·수궁(壽宮)·수성(壽城) 등의 뜻이니, 살아 생전에 미리 자신의 묘를 만든 것. ③ 장수(長壽)의 境. ↩
홍대(洪大) 또는 홍렬(洪烈)의 위업(偉業). ↩
스님의 아름다운 덕. 『爾雅(이아)』석(釋)에 "休 美也"라 하였고, 『爾雅』釋言에는 "休 慶也"라 하다. ↩
태조에게 하늘이 도와 주는 덕이 있다라는 말. ↩
정치를 잘 하여 성군이 되는 것. ↩
① 변화(變化)의 근원(根元) ② 성군(聖君)이 되어 국민을 교화하는 근원을 터득코자 하는 것. ↩
유운(幽運)과 같은 뜻이니, 인간의 범정(凡情)으로는 알 수 없는 깊이 가려 있는 운수(運數). 곧 왕건이 천명을 받아 고려의 개국조(開國祖)가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던 것이 유수(幽數)이다. ↩
고려 제8대 현종 임금. 생존 992∼1031년, 재위 1010∼1031년.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 안종(安宗)인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효숙태후(孝肅太后 : 獻貞王后). 비(妃)는 성종의 두 딸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그리고 시중(侍中)인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 등이다. 시호는 원문(元文). 능호는 선릉(宣陵)이니, 개성에 있다. ↩
고려 제15대 숙종 임금. 생존은 1054∼1105년. 재위는 1095∼1105년임. ↩
효공(孝恭)의 오식(誤植)이니, 효공대왕은 곧 의종의 아버지인 인종의 시호이다. ↩
인종 이전 고려의 역대 임금을 뜻함. ↩
도선의 시호이니, 인종이 추증하였다. ↩
고려의 제18대 의종 임금을 지칭함.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임. ↩
도선의 행적 사실을 비문에 새겼다는 말. ↩
物이란 ① 모든 국민 ② 일체만물(一切萬物). ↩
875년 왕륭(王隆)이 담을 쌓고 있을 때, 도선(道詵)이 그 곳을 찾아가서 2년 후에 마땅히 왕자(王者)를 출생할 것이라고 미리 알았다는 말. ↩
그가 말한 예언은 그가 죽은 뒤에도, 모두 적중하였다라는 뜻. ↩
오호(嗚呼)·어호(於乎)·어황(於皇) 등이라고도 하니, 탄미(歎美) 또는 감탄사로서 오호라고 음독함. ↩
漢나라 때 사람. 이름은 양(良).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의 선조는 한조(漢朝)에서 5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했다. 秦나라가 漢을 멸망시킨 후, 良은 전재산을 털어 자객을 구하여 진시황을 자살(刺殺)해서 漢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를 얻어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하였으나, 오발(誤發)로 부거(副車)에 적중되어 시왕은 죽음을 면했다. 이로 말미암아 범인 색출에 총력을 경주한 탓으로 피신(避身)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성명을 고쳐 은신(隱身)하였다. 그때 태공(太公)의 병법(兵法)을 상(上)의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한다. 한(漢)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이 군대를 일으켰을 때, 良은 항상 곁에서 모책(謀策)을 제공하여 마침내 항우(項羽)로 하여금 오강(烏江)에서 자문(自刎)케 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의 고조(高祖)에 오르게 하였다. 양(良)은 유후(留侯)에 봉(封)해졌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황노(黃老 : 黃石公)를 좋아하여 신선벽곡(神仙辟穀)의 術을 배웠다. 소하(蕭荷)·한신(韓信)과 함께 漢의 삼걸(三傑)로 일컬어졌다. 『사기』권55, 『한서』권40 참조. ↩
석보지스님의 예언과 같이 적중하였다는 말이니, 석지(釋誌)스님이 양(梁) 무제(武帝)를 만났던 고사이니, 『梁高僧傳(양고승전)』卷10에는 보지(保誌)로 전하고 있다. 지공(誌公)은 신승(神僧)으로써 많은 기적과 예언을 나타내어 당시의 불교 중흥에 지대한 공로를 끼쳤으나, 소제(簫帝)의 건원 년중(建元 年中 : 479∼842)에 고제(高帝)가 국민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투옥하였는데, 그 후 양(梁) 무제(武帝)가 즉위하고는 곧 석방하여 크게 존경하며 국사처럼 모시었다. 「원주 흥법사 지공대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高麗篇 1) 주 87) 梁武之逢寶誌條와 「죽산 칠장사 혜소국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高麗篇 2) 주 216) 誌公 梁武條, 『梁高僧傳』권10, 釋保誌狀(大正藏 권50, p.394 上段) 등 참조. ↩
짐(兆朕)·전조(前兆)·징후(徵候) 등과 같은 뜻. 미래에 대한 사건으로써 아직 전혀 조짐은 없으나, 이를 예언하는 것. ↩
일행선사(一行禪師)이니, 도선이 입당(入唐)하여 일행(一行)으로부터 삼교(三敎)·천도(天道)·음양(陰陽)·산수(算數) 등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高麗國師道詵傳」(『朝鮮寺刹史料』下 pp.377∼379) 참조. ↩
우(耦)는 우(偶)와 통하는 字이니, 짝이란 뜻으로, 일행선사(一行禪師) 도선의 예언이 석보지(釋寶誌)의 예언과 비교할 만하다는 말. 여(歟)는 어조사이니, 감탄을 강조하는 조사. ↩
도선국사가 지은 음양지리서로써 ①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② 도선시당기(道詵時堂記) ③ 도선실기(道詵實記) ④ 도선비기(道詵秘記) 등을 지칭함. ↩
선종에서 주창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종지(宗旨)를 말함. ↩
일념(一念)은 순간이니, 짧은 시간이고, 천겁은 영원이니 한량 없이 긴 시간으로써, 화엄의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란 말과 같음. ↩
그 세계, 곧 선(禪)의 세계를 말함. ↩
① 도가 극치에 이르면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無學이라 한다. ② 범어에 Asaika이니, 極果란 뜻.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이 된 경지. ↩
정사(正邪)와 곡직(曲直)을 관찰하는 바른 견식(見識). 본분을 깨달은 종사(宗師)의 푸른 눈동자. ↩
지혜의 눈이 사방(四方)으로 활짝 열렸다는 뜻이니, 사통(四通)과 같은 말. ↩
육신통(六神通)의 준말. ① 천안통(天眼通) :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 ② 天耳通(천이통) : 보통 귀로는 듣지 못할 소리를 듣는 것. ③ 타심통(他心通) :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훤히 아는 신통. ④ 숙명통(宿命通) : 지나간 세상의 일을 자재(自在)하게 아는 신통. ⑤ 신족통(神足通) : 불사의(不思議)한 경계를 마음대로 나타내는 신통. ⑥ 누진통(漏盡通) : 일전번뇌(一切煩惱)가 모두 끊어진 신통. ↩
잔여(殘餘)와 같은 뜻. ① 사용하고 남은 것. ② 사업의 여력. ③ 본업(本業) 외의 여기(餘技). ④ 이상 서술한 것 외의 나머지. ↩
시초로써 점치는 것. 시초(蓍草)란 숙과에 속하는데, 높이는 5∼6척(尺). 일근(一根)에 수십 개의 줄기가 있다. 여름에 황백색(黃白色)을 띤 나비 모양의 꽃이 핀다. 『說文(설문)』에 시초는 천년을 살고 줄기가 300개라고 하였다. 이 풀은 문왕(文王)의 묘에서 낳는데, 영초(靈草)라고 한다. 복서(卜筮)란 점복(占法)의 일종인데, 복(卜)은 거북의 등을 태워서 점치는 것이고, 서(筮)는 시초(蓍草)로써 점을 치는 법이다. ↩
먼 미래의 일을 미리 아는 것. 곧 예언이란 뜻. ↩
구방(舊邦)인 궁예와 견훤 등의 난은 비로소 정돈되었으나라는 뜻이니, 아직 완전한 평정은 되지 않았다는 말. 숙(俶)은 정(整) 또는 시(始)의 뜻. ↩
도선이 875년 왕륭(王隆)의 처소로 찾아가 비결서(秘訣書) 1권을 지어 주면서 2년 후(877)에 태어날 당신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니, 30세가 넘거든 이 책을 전해 주라고 하였다. ↩
태조가 등극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마치 文王이 주(周)나라를 건설하고, 고조(高祖)가 한(漢)나라를 일으킨 것과 같아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유자재하다는 말. ↩
성인이 나타났다는 말이니, 도선이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이인(異人)이 찾아와서 지리를 일러준 사실을 말함. ↩
① 천자(天子)가 되리라는 부서(符瑞)에 합치하는 것. ② 천자가 되리라는 예언에 부합하는 일. 장형(張衡)의 「東京賦(동경부)」에 "高祖膺籙 受圖 順天行誅"라 하다. ↩
사람은 비록 먼 세대를 隔하여 다르다는 말이니, 漢나라 때 황석공(黃石公)이 장자방에게 병법서를 전해 주면서 예언한 것과, 신라말에 도선이 왕륭(王隆)에게 지리서를 주면서 예언한 것이, 비록 사람과 세대는 격세(隔世)하지만이란 뜻. ↩
지나간 세상이 이미 삼백년이 지났다는 뜻이니, 도선이 예언하던 875년부터 이 비석을 세우던 해인 1150년과의 사이는 275년간이 되므로 300年으로 표기한 것이다. ↩
유풍(遺風), 풍아(風雅) 등의 뜻. 범속(凡俗)을 초탈한 사람. 풍아(風雅)를 좋아하는 사람. ↩
풍류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말. ↩
국사의 위업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고 넓다는 뜻. ↩
① 돌이 많은 모양. ② 돌이 하늘 높이 쌓여 있는 모양이니, 국사의 홍대한 업적(業跡)에 비유하는 말. 『楚辭』九歌 山鬼에 "石磊磊兮여 葛蔓蔓"이라 하다. ↩
국사가 생전에 살던 옛 절이니, 옥룡사를 지칭함. ↩
① 호랑이의 다른 이름. 『說文(설문)』에 "호(虎)는 산수지군(山獸之君)"이라 하고, 『騈雅』釋獸에 "山君은 虎也"라 하다. ② 산신(山神). ↩
천덕(天德)은 금(金)나라 제량(帝亮)의 연호이니, 고려의 의종 4년(1150). ↩
도선의 문인(門人)이니, 처실(處實)의 법호. 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
삼중대사 영오(三重大師 穎悟)의 법명. ↩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긴 다음 해라는 뜻이니, 의종 5년인 1151년을 가리킴. ↩
신(臣) 최유청(崔惟淸)과 정서(鄭叙)도 함께 간악한 무리들의 참소와 사당(邪黨)들의 무고를 당하였으며, 혹은 유배를 갔거나, 혹은 파직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최유청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에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되었다(本 碑文 주 9) 崔惟淸條 참조). 그리고 정서(鄭叙)는 인종비(仁宗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여동생의 남편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1151년 폐신(嬖臣) 정함(鄭諴)과 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고향인 동래(東萊)로 장류(杖流)되었다(本 碑文 註 11) 鄭叙條 참조). ↩
喙(부리 훼字)는 啄(쪼을 탁字)이니, 백탁(百啄)이란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것. 백방으로 비행을 들어 공격하는 것. ↩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 비문을 찬술하게 되었지만, 신(臣)에 대한 현(賢)과 불초(不肖)의 죄를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언반구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비는 마땅히 세워야 할 것이나, 그러나 云云. ↩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에 있었던 절. 선종 6년(1089) 10월 15일에 선종비 사숙태후(思肅太后)가 창건을 시작. 그 후 숙종 1년(1095)부터 인예태후(仁睿太后 : 문종비)의 기신도량(忌晨道場)으로 삼았으며, 1097년 5월부터 의천이 이 절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설하였다. ↩
① 문(門)간채의 처마. ② 묘문(廟門)에 이르는 양쪽의 행랑. ③ 사원의 일주문이나, 사천왕문 등의 처마. 劉克莊, 「辛卯滿散天基節卽事詩」에 "門廡 無人殿未開 白頭散吏久徘徊"라 하다. ↩
① 방치해 두는 것. ② 내던져 버리는 것. ↩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하였다는 뜻. ↩
① 비상한 공열(功烈). ② 뛰어난 사적(事跡). ③ 국가에 대한 비교할 수 없는 큰 공적. ↩
고려 제18대 의종 임금을 지칭함. ↩
용을 타고 등극하였다는 뜻이니,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는 말. ↩
궁예와 견훤 등을 지칭함. ↩
백도유신(百度惟新)의 준말. ①모든 법도(法度) ②백사(百事)의 절도(節度) ③주야(晝夜)의 백각(百刻)을 말함. 『수서』백관지 序에 "高祖踐極 百度伊始"라 하다. ↩
維新이라고도 씀. 만사를 고쳐 새롭게 하는 것. 구폐(舊弊)를 말끔히 씻어 혁신하는 일. 『시경』 大雅 文王에 "周雖舊邦 其命維新"이라 하다. ↩
본래는 광엄사(光嚴寺)였으나, 뒤에 운암(雲巖)으로 바꾸었다. 경기도 개성시 무선봉 밑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뒤에 공민왕 현릉(玄陵)의 제궁(齊宮)이 되었다. ↩
도선의 수제자. 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태사국(太史局)이니, 고려 때의 관청. 천문(天文)·역수(曆數)·측우(測候)·각뇌(刻漏)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
광양현에 속한 공원(貢員)이니, 국가에서 필요한 물건(物件)을 구하여 바치는 벼슬. ↩
고려 때 궁중에 술을 바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 문종 때 설치. 뒤에 장례서(掌醴署)로, 숙종 때 양온서로, 충렬왕 34년(1308)에 사온서(司醞署)로, 공민왕 때 양온감(良醞監)으로 바뀌었다. 양온서에는 정8품(正八品) 령(令) 2명, 정9품(正九品) 승(丞) 2명이 있었다. ↩
양온서내(良醞署內)에 속한 부서. ↩
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
태사국(太史局)이라고도 함. 본 비문 주 147) 大史氏 참조. ↩
설(挈)은 설(偰)의 오자(誤字). 태사국(太史局)의 종8품(從八品) 관리. ↩
다른 자료에도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
지리를 살펴 비석을 세울 터를 잡았다라는 말. ↩
『고려사』권77, 백관지 2 문산계에 따르면, 종9품(從九品)의 상(上)은 문림랑(文林郞)이고, 하(下)는 장사랑(將仕郞)이라 하였다. ↩
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
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
대정(大定)은 금(金)의 세종 연호. 고려 명종 2년(1172). ↩
비를 세운 기반이 튼튼하여 비가 기울어지지 않으리라는 뜻. ↩
그 당(堂)이 바로 옥룡사의 동북쪽 200보 지점에 있다라는 말. 직자(直字)는 혹 置字가 아닌지?. ↩
① 환경이 상쾌(爽快)하고 고조(高燥)하며 밝은 땅. ② 고대(高臺)의 위치. ③ 높고 밝은 지대 곧 명당이란 뜻. ↩
비석의 배면(背面)이니, 음기인 후면을 말함. 이 후면에 새기는 것을 음기라고 한다. ↩
대정13년(大定十三年)이니, 명종 3년(1173). ↩
좌측(左側)·좌면(左面)과 같음. 왼쪽. 지금의 횡서(橫書)로 보면 아래 또는 다음이란 뜻. ↩
경기도 개성시 용수산성(龍首山城) 내(內)에 있었던 절. 『신증동국여지승람』권4, 開城府上 佛宇條.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사적(寺跡)이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도선국사의 제자.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자금어대(紫金魚袋)의 준말. 당대(唐代) 중국의 관리들은 관품의 고하에 따라 관복의 색깔과 허리에 띠고 다니는 어대의 종류가 달랐다. 3품이상은 자색 관복과 금어대(金魚袋), 4·5품은 비색 관복과 은어대(銀魚袋), 6·7품은 청색 관복과 동어대(銅魚袋), 그리고 8품이하는 황색 관복과 철어대(鐵魚袋)였다. 「충주 월광사 원랑선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주 8) 賜緋魚袋條 참조. ↩
고려 문산계의 관계 중의 하나. 종3품(從三品)으로 문종 때 제정.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2) 주 3) 光祿大夫條 및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주 6) 金紫光祿大夫條 등 참조. ↩
1173년에 운암사 주지 지문 등이 비의 음기를 새기도록 주청하므로, 의종이 이를 윤허하였다는 말. ↩
왕명으로 국사의 법손이 계속 전지(傳持)하면서, 국사의 유전도량(遺傳道場)으로 문인들이 주지하고 있는 4개 사찰이니, 856년에 창건한 미점사(米岾寺), 858년에 창립한 도선사(道詵寺)와 삼국사(三國寺)와 856년에 건립된 운암사(雲岩寺) 등이다. ↩
평안북도 영변 묘향산 보현사. ↩
고려의 고승. 글씨에 정통한 명필로써, 1172년 지리산 단속사 대감국사 탄연(坦然)의 비문과 순천(順天)의 수성비문(守城碑文) 등도 썼다. 「산청 단속사 대감국사비문」『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 주 13) 機俊條 참조. ↩
도선의 문인.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