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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사자산(師子山) 흥▨▨▨(興▨▨▨) 교시(敎諡)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청대부(朝請大夫)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언휘(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교지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살펴 보건대 진종(眞宗)은 본시 적적하건만 억지로 교(敎)의 문을 설립하였고, … 전심(傳心)의 취지를 제창하였으니, 그 추요는 심오한 뜻[玄機]2이어야 알 수 있는 그윽한 경지[玄境]3인 것이며, 그 종지(宗旨)는 부처의 말과 마음이므로 이름과 말로써 그 시종(始終)을 엿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으로도 법도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때를 타고 원력(願力)으로 출세한 신인(神人)이 있으니, 그는 언진(言津)4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걸어가 바로 성해(性海)로 돌아갔으니 마침내 뜻의 길을 따라 외로이 선산(禪山)에 들어갔다. 반드시 이단(異端)을 천착하고 그 사견(邪見)을 믿어서 … 마음이 마치 원숭이처럼 날뛰어 항상 삼독의 숲을5 요란하게 하다가 홀연히 좋은 인연을 만나 선유(善誘)임을 알았다. 이와 같이 미혹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곧 징효대사(澄曉大師)이시다. 대사의 휘(諱)는 절중(折中)이요, 자(字)는 … 속성은 … 휴암(鵂嵒)6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모성(牟城)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드디어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동(先憧)7이니, 기예는 궁술과 기마에 뛰어났으며8 명성은 화이(華夷)에 떨쳤다.9 효자(孝慈)는 역사책[史官]에 실렸고, 공적은 왕부(王府)10에 간직되어 군성(郡城)11의 귀감이며 마을[閭里]의 동량이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선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이르되 “아미(阿㜷)12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 하면서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전해 받고는 대사(大師)를 임신하였다. 그 후 보력(寶曆) 2년(헌덕왕 18, 826) 4월 7일에 탄생하니,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13 일찍부터 아이들과 같이 장난하지 아니하였다. 일곱 살 때 걸식(乞食)하는 선승을 보고 흠모하여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한 다음, 드디어 양친(兩親)을 하직하였다. 외롭게 오관선사(五冠山寺)14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니 법사가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식심(息心)의 뜻에 계합하여 곧 절[慈室]에 있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15 … 모두들 말하기를 “후대(後代)의 도안[漆道人]이 여기에 다시 나타났다”면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구의사미(救蟻沙彌)16와 더불어 어찌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곧바로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화엄경[雜華]을 배워 방광(方廣)의 진전(眞銓)을 찾았으며, 십현(十玄)17의 묘의를 연구하였다. 의학(義學)하는 사문들이18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공융(孔融)이 응문(膺門)에 나아가서19 마침내 망년(忘年)의 벗을 삼은 것과 같았으며,20 … 지켜 죽음을 같이하는 교우(交友)가 되었다.21 열아홉 살 때 백성군(白城郡)22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였을 때,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행하려 상단(上壇)23하는 날, 갑자기 자색 기운이 단중(壇中)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어떤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되, “이 사미(沙彌)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하루아침[一朝一夕]에 닦은 공이 아니니,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은 마땅히 이미 계율[戒珠]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드시 후대(後代)의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큰 재목(材木)이므로 수계하기 전 먼저 이러한 상서를 나타낸 것이다”라 하였다. 돌이켜 태몽(胎夢)을 생각하니 참으로 합부(合符)하였다. 이로부터 정성스럽게 계율[浮囊]을 지키며 멀리 절경(絶境)24을 찾아다니다가 풍악산25 장담사(長潭寺)26에서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선비(禪扉)27로 찾아가서 오체투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화상이 이르되 “영산에서 서로 이별한 후 몇 생(生)이나 되었는가.28 우연히 서로 만남이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하였다.29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았고 스님의 자풍(慈風)에 깊은 감명을 느꼈으므로, 나의 원에 적합하다면서 화상(和尙)을 사사하였다. 화상은 지난 날 중국(中國)에 가서 먼저 남전화상(南泉和尙)30을 친견하고 법을 이어 받았으니,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31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승사하였으므로32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몽자(冡子)이니,33 그 고매(高邁)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도윤을 모시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34 이 때 “내 어찌 진단(震旦)에 유학하는 것을 늦추리요”하고는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사에게 나아가 … 자인(慈忍)선사를35 함께 친견하고 예배를 드리니,36 처음 뵙는 것 같지 않고 구면과 같음을 느꼈다. 도담선사가 말하되 “늦어서야 상봉(相逢)하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되었는가”하거늘, 이에 대사(大師)가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병이 곧 병이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37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이름이38 무엇인가”39 대사(大師)가 또 답하되 “절중(折中)입니다”하였다. 선사(禪師)가 이르되 “절중(折中)이 아닐 때에는 누구인가” 대답하되 “절중(折中)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이름 밑에 허사(虛事)가 없으니, 이제 절중(折中)은 어찌할 수 없구나!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였다. 그러므로 16년 동안 선방에서40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드디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았으며, 마침내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41 붉은 빛을 꼭두서니에서 뽑아냈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집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天下)를 두루 아는 자를 대사(大師)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구슬을 찾고, 산에 올라가 옥(玉)을 캐는데 있어 어찌 정(定)해 놓은 스승이 있으리요. 이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행장을 짊어지고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중화(中和) 2년(헌강왕 8, 882)에 전 국통42인 대법사(大法師) 국공(威公)이 대사(大師)가 머물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43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과 같았다. 생각 끝에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곡산사(谷山寺)44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으니, 애써 주선해준 단성(丹誠)에 못 이겨 잠깐 주석하였지만45 경연(京輦)46과 가까운 것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에 석운대선사(釋雲大禪師)가 있었는데,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덕은 화이(華夷)를 덮었는데도 정해진 거처(居處)가 없음을 알고 신족(神足)47을 보내어 간절한 성의를 표하여 말하되, “노승(老僧)이 있는 이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大師)가 여기에 주석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만약 스님이 아니면 누가 이 도량(道場)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왕림(枉臨)하여 송문(松門)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청을 받은 대사(大師)는 그 성의를 거역할 수 없어 곧 선중(禪衆)을 데리고 그 곳에 주석하였다. 이 절의 경치는 천봉만학이 마치 병풍처럼 열려 있고, 층암 절벽의 절경이어서 참으로 해동(海東)의 가경(佳境)이며, 또한 천하(天下)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었다. 대사(大師)가 여기에서 도착한 날로부터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넷으로48 끊임없이 모여들어, 마치 비처럼 모이고 바람과 같이 달려와서 도리(桃李)처럼 말없이도 모여들고 벼와 삼처럼 줄을 썼다. 이 때 헌강대왕49이 봉필(鳳筆)50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고는 사자산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51에 예속시켜 대사(大師)를 그 곳에 있게 하고는 나라의 중흥(中興)을 기꺼워하였으나, 갑자기 헌강대왕이 승하하여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52이 즉위하여 선교를 존숭함이 전조(前朝)보다 못하지 아니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멀리서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뜻 밖에 정강왕(定康王)도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여53 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고, 국조(國祚)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연진(煙塵)54이 일고, 갑자기 요기(妖氣)가 가득하여 산중 절[蓮扉]에까지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대순(大順) 2년55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 가서 잠시 조령(鳥嶺)에서 서지(栖遲)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본산(本山)인 사자산이 병화(兵火)를 만나 귀한 사찰[寶坊]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대사(大師)는 혜안으로 미리 길흉(吉凶)을 점쳐 건물과 함께 타 죽을 액난을 면하였다.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56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승려와 동궁내양(東宮內養)57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58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이 날 대사(大師)는 북지(北地)를 떠나 점차 남행(南行)하다가 공주(公州)를 향해 지하(城下)를 지나가는데, 장사(長史)인 김공휴(金公休)가 군리(郡吏)인 송암(宋嵒) 등과 함께 멀리서 듣고 자(慈) … 에 이르러 군성(郡城)으로 영입하고 겸하여 … 대사가 머무르기를 요청하였다. 대사(大師)가 장사(長史)에게 이르되 “빈도(貧道)는 늙어 죽음이 임박하였으므로 쌍봉사에 가서 동학(同學)들을 만나보고 선사(先師)의 탑에 참배하려 하니 만류하지 말아 달라”하시고, 드디어 몇 사람의 대중을 거느리고 떠나 진례군계(進禮郡界)59에 들어서자마자 적도(賊徒)들이 길을 차단함을 당하여 대중들이 길을 잃게 되었다. 이 때 홀연히 운무가 몰려와 어두워지며 캄캄해지더니60 공중(空中)에서 병마(兵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도적의 우두머리 등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뒤로 물러서면서61 뿔뿔이 흩어졌고, 대사(大師)와 대중은 재앙을 면하였으니, 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 가호해 주신 덕택이라 하겠다.62 한탄스러운 바는 전국 방방곡곡에 초적(草賊)63이 출몰하여 조용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위험한 때에 밤을 새워가며64 길을 재촉하여65 무부(武府)66에 도달하였으니, 병사들도 공경히 받들었고, 일군(一郡)은 편안하게 되었다. 진성왕은 대사가 남방(南方)으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67 서경(西境)을 보호하였으며 군흉(群凶)들이 예배하고 대대(大憝)가 귀의하였다. 임금은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며 겸하여 어머니[北堂]를 위해서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68 두 절을 헌납하여 주석(住錫)하도록 하였다. 당주(當州)69의 군사(郡吏) 김사윤(金思尹) 등이 찾아와서 선지(禪旨)를 듣고 법문(法門)에 깊이 감명을 받아 분령(芬嶺)70에 계시도록 청하고, 군(郡)의 동림(桐林)을 선거(禪居)에 길이 예속시켜 열반(涅槃)할 종신처로 삼게 하였다. 혜원법사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진(晋)나라 안제(安帝)가 숭앙하고,71 승조(僧稠)가 효룡산(孝龍山)에 있을 때에 제(齊)나라 문선제(文宣帝)가 귀의하였으며,72 허순(許詢)73이 지둔(支遁)을 스승으로 모셨고,74 주서(朱序)75가 도안(道安)76대사를 존숭한 것 등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진량(津梁)77이 되며, 시대의 약석(藥石)78이라고 할 만하였다. 군신이 의뢰하며 사서(士庶)들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되 “이곳은 반드시 재해(災害)가 일어나 구융(寇戎)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터이니, 미리 대처하여 재난이 다가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하고 홀연히 북산을 향해 떠났다. 서해(西海)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79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였다. 대사(大師)가 뱃사공[海師]에게 “주야 육시(六時)로 천리(千里)쯤 온 듯하니 여기가 어디며,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었다.80 뱃사공이 대답하되 “전도(前途)를 암산하니 아마 서국(西國)81일 듯하다”고 하였다. 뱃사공의 말을 들은 대사(大師)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전에 진(秦)으로 유학하려던 때는 기상이 컸는데 노승(老僧)이 이제야 유학승이 되었구나. 옛날 유학하려던82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니 때가 너무 늦은 것을 다시 느끼네! 황홀하고 침음(沉吟)하면서 근심에 잠겼다. 그날 밤 꿈에 해신(海神)이 나타나 이르되 “대사(大師)께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포기하고 본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상심(傷心)하지 말라”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반일(半日) 쯤 가다가 당성군(唐城郡)83의 서계(西界)인 평진(平津)84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수진(守珍)으로 가서 임시로 머물고자 하여 드디어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매우 훌륭한 도량이었다. 그 곳에서 십여 일 동안 임시로 주석하고 있었다. 대왕(大王)85이 황양현(荒壤縣)86 부수(副守)인 장연설(張連說) 편으로 명다(茗茶)와 명향(名香)을 담은 양함(琅函)을 보내면서 “항상 스님을 왕좌(王佐)의 재목(材木)으로 흠모하였으므로, 이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합니다”고 전하였다. 대사(大師)는 전쟁[煙塵]의 핍박으로 세상이 혼란하다 하여 설린(薛藺)의 요청을 거절하고,87 주풍(周豊)의 간청도 사양하면서88 이르기를 “세상은 모두 혼탁하고 시대는 오랫동안 혼미하므로 반딧불로는 능히 한밤의 어둠을 제거(除去)할 수 없고, 아교로써 능히 황하(黃河)의 탁류를 막을 수 없다”고 하며, 항상 어두운 현실을 보니 실로 삶의 길이 싫어졌다. 건녕(乾寧) 7년(효공왕 4, 900) 3월 9일 새벽[詰旦]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이르되, “삼계(三界)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만연(萬緣)은 모두 적적한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하였다.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입멸(入滅)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5세요, 법랍은 56년이었다. 이때 하늘빛은 창망하였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은 모두 눈을 잃은 듯 하였고, 세상은 함께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門下)의 제자들이야 오죽 하였겠는가. 모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제자들은 함께 슬픈 표정으로 천축(天竺) 구시라(拘尸羅)의 법89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90하고, 사리 천과(千粿)를 습득하였다. 그 날 밤 황양현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이 말하되, “석단(石壇) 위에서 자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더니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주워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원중(院中)에 가서 자세하게 그 특수한 상서를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전해 듣고 깜짝 놀라 쌍림(雙林)91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일백여 과의 사리를 습득하게 되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였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마지아니하였다. … 이는 강안(江岸) … 현읍(縣邑)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산사(山寺)와의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바다의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스님들만이 살고 있으므로, 마치 절벽에 매달린 제비집과 같았다.92 그리하여 사리를 모시고 동림(桐林)으로 돌아가서 천우(天祐) 3년(효공왕 10, 906)에 높이 석탑을 세우고 그 금골(金骨)93을 안치하였다. 대사(大師)는 영악(靈岳)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선천적으로 지혜로웠고, 선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무생(無生)의 언덕에 올랐으며, … 가는 곳마다 선(禪)의 종지만을 물었고, 거주(居住)하는 장소마다 현리(玄理)를 참구하였으니, 진승(眞乘)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중은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모인 사람은 바다와 같았으며, 학인(學人)을 지도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스님은 중생을 위해 현생(現生)하였으며 곳을 따라 교화하여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니,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선관(禪關)을 크게 열고 대교(大敎)를 천양하여 말세(末世)에 있어 마군을 소탕하고, 삼조(三朝)94에 걸쳐 왕도(王道)를 부호(扶護)하여 풍거(風竅)95와 같이 숙연한 위엄을 떨쳤으며, 항상 … 우로(雨露)가 만물을 생성케 하는 것과 같이 덕을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 밭에 뿌렸고, 심지어는 깊은 진리를 가르치고 도타운 뜻을 일러 주었다. 이와 같은 위업이 혹은 학도(學徒)들의 입으로 전파되기도 하고, 혹은 승사(僧史)에 실려 있기도 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는 여종(如宗)·홍가(弘可)·신정(神靖)·지공(智空) 등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를 모두가 석성(石城)96이 무너질까 염려하며, 함께 사리를 모신 높은 언덕이 능곡(陵谷)으로 변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금님께 표상(表狀)을 올려서97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주청하였다. 효공대왕98은 일찍부터 대사의 빛나는 도풍(道風)을 앙모하여 항상 불교를 존숭한 까닭에 시호를 징효대사(澄曉大師)라 하고, 탑명을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어 한림학사이며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인범이 왕명(王命)을 받고 비문을 짓기 전에 와병으로 죽었으니,99 장학(藏壑)100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리하여 이 일은 문인(門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방진(芳塵)101은 점차 사라지고 아직 정석(貞石)102을 새기지 못하게 되자 문인들의 뜻을 모아 행장(行狀)을 초안해서 내운(乃雲) … 학려(鶴唳)103와 같은 애절한 진정(陳情)이 하늘에까지 들렸던 것이다. 경명왕은 신기(神器)로 아름다움을 전하고 보도(寶圖)로 천명(天命)을 이어 선왕의 뜻을 계승하며, 이를 뒷사람들에게 널리 보여 주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높은 공적을 찬양하라 하시지만, 인연(仁渷)은 재주가 토봉(吐鳳)104이 못될 뿐만 아니라 학문도 망양(亡羊)105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계과(桂科)에는 비록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나, 제구(虀臼)106에 대해서는 상수(傷手)107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는 바는 억지로 붓을 잡아108 비문을 지었으니, 이로써 국왕의 은혜를 갚고 아울러 문인(門人)들의 뜻을 위로함이니, 앞의 뜻을 거듭 밝히고자 이에 명(銘)을 짓는다. 대각의 대승법이여! 묘도(妙道)를 열어주고,능인(能仁)의 비밀법(秘密法)이여! 중생을 인도하네. 진위(眞僞)를 분간함이여! 시대(時代)를 깨우쳤고 범부(凡夫)가 곧 성인(聖人)이여! 모두가 부처로다.109 오산(鼇山)110에 빼어남이여! 기골(奇骨)을 받아 낳고, 학수(鶴樹)서 열반함이여! 보신(報身)을 화장했네. 비로소 그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빛난 그 이름! 날마다 새롭도다. 장례의 법요무(法要式)이여! 정성을 다하였고, 법을 계승한 제자는 천명(千名)이 넘네! 달빛이 조문(弔問)함이여! 햇빛은 침침하고, 나원(奈苑)111에 뿌려줌이여! 그 감로(甘露) 사라졌네. 장로(長老) … 장로 운초(雲超) … 지주인화상(持主人和尙) 장로 형서(夐栖), 장로 예홍(乂洪)이 용덕(龍德) 4년(경명왕 8, 924) 갑신(甲申) 4월 15일에 비문을 완성하였으나, 국가가 다난(多難)하여 24년[二紀]을 지낸 후에야 비로소 사군(四郡)의 연진(煙塵)이 사라지고, 일방(一邦)의 전란이 평정되었다. 천복(天福) 7년(혜종 1, 944) 갑진 6월 17일에 세우고, 최환규(崔奐規)가 글자를 새기다. 【陰記】 삼가 현철(賢哲)과 승속 제자들의 존위(尊位)를 기록하여 다음에 배열(排列)한다. 능선사주(能善寺主)112 승전사주(乘全寺主) 총월사주(聰月寺主) 최허대덕(崔虛大德) 홍람대덕(弘㑣大德)113 계정대통(契貞大統) 경보대통(慶甫大統)114 성언대덕(性言大德) 왕요군(王堯君)115 왕소군(王昭君)116 ▨▨대왕(▨▨大王) 필영대왕(弼榮大王) 영장정광(英章正匡)117 왕경대승(王景大承)118 청단▨주(淸端▨主)119 김일소판(金鎰蘇判)120 긍달소판(兢達蘇判)121 왕규좌승(王規佐承)122 권▨좌승(權▨佐承)123 왕순좌승(王詢佐承)124 성준원보(誠俊元甫)125 ▨▨▨상(▨▨▨相) 김환아찬(金奐阿飡) 김휴장사(金休長史)126 일휴랑(鎰休郞) ▨순원보(▨順元甫) 희열조(希悅助) 긍열조(兢悅助) 식영한찬(式榮韓飡) 관질한찬(寬質韓飡) 긍일해찬(兢鎰海飡) 현달원보(賢逢元甫) 관헌원보(官憲元甫) 겸상해찬(廉相海飡)127 윤달원보(允逢元甫) 헌옹원윤(憲邕元尹)128 사윤일철찬(師尹一哲飡) 간영아간(侃榮阿飡) 장검사상(章劍史上) 필형대감(弼邢大監) 요겸랑(姚謙郞) 최방원윤(崔芳元尹) 기오원윤(奇悟元尹) 기달원윤(奇達元尹) 지연정위(知連正衛)129 여일정조(與一正朝)130 평직아간 명주(平直阿干 溟州) 기내 명주(奇柰 溟州) 김예경 명주(金芮卿 溟州) 연세대감 명주(連世大監 溟州) 왕간내 원주(王侃奈 原州) 덕영사간 죽주(德榮沙干 竹州)131 제종사간 죽주(弟宗沙干 竹州) 송암사상 공주(宋嵒史上 公州) 평직촌주 제주(平直村主 提州)132 귀평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 提州) 견필촌주 냉주(堅必村主 冷州) 견화사간 신지현(堅奐沙干 新知縣) 월지산인 신지현(越志山人 新知縣) 애신사간 우곡군(哀信沙干 又谷郡) 능애사간 우곡군(能愛沙干 又谷郡) 세달촌주 내생군(世達村主 奈生郡) 식원댁삼 냉수현(式元大監 冷水縣) 명환촌주 주연현(明奐村主 酒淵縣)133 강선조 별근현(康宣助 別斤縣) 전립방 소랑(全立房所郞) 길사촌주 단월이(吉舍村主丹越駬) 최산내은(崔山㭆听)당시의 삼강(三綱)과 전명위열(典名位列) 원주(院主):희랑장로(希朗長老)134 전좌(典座):흔효상좌(昕曉上座) 사(史):도증선사(道澄禪師) 직세(直歲):낭연선사(朗然禪師) ▨검교유나(▨檢校維那):낭선장로(良善長老) 당유나(堂維那):계융상좌(契融上座) 지객(持客):계렴선사(契廉禪師)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1. 흥녕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선찰(禪刹)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다. 흥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성종(1469~1494) 이전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2. 현묘(玄妙)한 진리를 알 수 있는 근기(根機)를 뜻함이니, 상근기인(上根機人)을 가리킴.

    3. 玄境:현묘(玄妙)한 진리를 가리킴이니,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진리. 즉 조사선리(祖師禪理)를 뜻함.

    4. 언전(言詮)이라고도 함. 언어진량(言語津樑)의 준말로 언어적(言語的) 표현(表現)으로 지도한다는 뜻이니, 교종(敎宗)을 지칭함. 『永平廣錄』 卷8에 “不涉言詮唯證契하며 無滯念想是直指”라 하다.

    5. 毒林:삼독림(三毒林), 번뇌림(煩惱林), 갈등림(葛藤林), 망상림(妄想林) 등의 뜻.

    6.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의 옛 이름이니, 고구려(高句麗) 때는 휴암군 또는 휴류군(鵂鶹郡), 신라 때는 서암군(栖岩郡), 고려(高麗) 때는 봉주(鳳州) 또는 황주(黃州), 봉양군(鳳陽郡)이라 하다가,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에 봉산군(鳳山郡)으로 바꾸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41, 鳳山郡 建置沿革條 참조).

    7. 절중(折中)의 부명(父名)인데, 당시 무관(武官)에 속한 듯 하다(「慶州 高仙寺 誓幢和尙碑文」 참조).

    8. 藝高弓馬:예기(藝技)가 궁술(弓術)과 기마(騎馬)에 뛰어났다(高)는 말.

    9. 名振華夷:그의 명예가 중화(中華)와 구이(九夷)에 떨쳤다는 말이니, 즉 명성이 천하(天下)에 떨쳤다는 뜻.

    10. 왕족(王族)의 저택(邸宅), 또는 왕조(王朝)와 같은 말.

    11. 모성군(牟城郡)을 가리킴.

    12. 어머니란 뜻.

    13. 聖姿:성스러운 자태. 즉 천자(天子)의 용모(容貌), 훌륭한 모습. 『吳志』 朱桓傳에 “桓曰 天授階下聖姿하사 當君臨四海”라 하다. 『金石全文』에는 성자(聖字)가 조(曺)로 되었는데, 이는 성(聖)의 오자(誤字)임.

    14. 오관산중(五冠山中)에 있었던 절이란 말. 오관산(五冠山)은 경기도 장단(長湍)에 위치. 이 산중(山中)에 극락사(極樂寺), 영통사(靈通寺), 흥성사(興聖寺)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 어느 절에 투신출가(投身出家)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5. 落采:낙발(落髮) 또는 삭발(削髮)과 같은 뜻이니, 낙(落)은 머리카락을 떨어뜨린다는 삭발(削髮). 채(采)는 䰂의 뜻이니, 낙발(落䰂)는 낙발(落髮)과 같은 뜻.

    16. 救蟻:어떤 사미스님이 나한(羅漢)인 은사(恩師)를 모시고 길을 가다가 홍수에 떠내려가기 직전에 있는 수많은 개미의 무리를 안전지대(安全地帶)로 옮겨 구출한 고사(「榮豊 境淸禪院 慈寂禪師碑文」 과「忠州 淨土寺 法鏡大師碑文」,「沙彌救蟻子水災得長命報緣」 雜寶藏經 卷4:大正藏 卷4, p.468 下段 등 참조).

    17. 화엄종에서 말하는 십현문(十玄門)이니, 이는 지엄십현(智儼十玄)과 현수십현(賢首十玄)의 두 가지가 있다.

    18. 義學:교리를 연구하는 교종학인(敎宗學人) 을 지칭함.

    19. 孔詣膺門:공융(孔融 : 後漢 때 魯나라 사람. 자는 文擧. 공자의 후예)이 응문(膺門 : 馬胸의 뜻이나, 여기서는 지명)에 나아가서.

    20. 競作忘年之友:서로 다투면서 망년(忘年)의 벗을 삼았다라는 뜻. 비록 나이가 많더라도 연소자(年少者)의 재질(才質)과 학덕(學德)을 소중히 여겨 나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귀는 벗. 예컨대 후한(後漢) 때 녜형(禰衡 : 20세)과 공융(孔融 : 50세). 『南史』에 원설(苑雪)과 하손(何遜), 배자야(裵子野)와 장찬(張纘), 『北史』에 이신준(李神雋)과 사소(邪邵), 배희지(裵&C129;之)와 신술(辛術), 당(唐)의 륙지(陸贄)와 장일(張鎰), 송(宋)의 전유연(錢惟演)과 매요신(梅堯臣) 등은 모두 망년지우(忘年之友)였던 사람들이다. 『後漢書』 禰衡傳에 “禰衡有逸才 少與孔融交 時衡未滿二十 而融已五十 爲忘年交”라 하고, 이어서 “唯善魯國孔融及弘農楊修云云 融亦深愛其才 衡始弱冠 而融年四十 遂與爲交友 上疏薦之曰 云云 鷙鳥累百 不如一鶚 使衡立朝 必有可觀”이라 하다.

    21. 幷日之交:날을 같이 한다는 뜻. 즉 동일(同日)과 같음. 1일이나 1년 등의 짧은 시간의 벗이 아니고, 마음을 서로 얽어매는 지기지우(知己之友)라는 뜻. 『後漢書』 朱穆傳에 “彼與草木俱杇 比與金石相傾 豈得同年而語 幷日而談哉”라 하다.

    22. 경기도 안성(安城)의 옛 이름이니, 고구려 때는 나혜홀(奈兮忽)이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백성군(白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이르러 안성현(安城縣)으로 개칭(改稱),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23. 上壇之日:비구계(比丘戒)를 받기 위하여 계단(戒壇)에 들어서는 날. 즉 수계(受戒)하는 날.

    24. 훌륭한 경치. 절묘한 승경(勝境). 아름다운 승지(勝地).

    25. 楓岳:금강산의 다른 이름. 개골(皆骨 : 冬), 풍악(楓岳 : 秋), 금강(金剛), 열반(涅槃), 황달산(怳怛山) 등 다섯 이름이 있다.

    26. □潭寺:『金石總覽』에는 담(潭)의 상자(上字)가 마멸되었으나, 『金石全文』에는 장자(長字)로 되어 있다. 장담사(長潭寺).

    27. 선경(禪扃)과 같은 뜻이니, 선사(禪寺)의 문(門). 즉 선방을 지칭함(「江陵 地藏禪院 朗圓大師碑文」 과「原州 興法寺 眞空大師碑文」 등 참조).

    28. 記得幾生:기억하니 몇 생 동안이던가.

    29. 來何暮矣:찾아옴이 어찌 그다지도 늦었는가! 늦게 찾아왔으나 기꺼워하는 말.

    30. 南泉(748~843):천(泉)은 음(音)이 전이니, 호(號)는 남전, 법명은 보원(普願), 속성은 왕씨(王氏),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31. 南泉承嗣於江西:남전은 강서(江西 : 馬祖道一)의 법을 계승하였다는 말

    32. 江西繼明於南岳:강서(馬祖)는 남악(南岳 : 懷讓)의 법명(法明 : 法燈)을 이어 받았다는 말.

    33. 曹溪冡子:조계(曹溪 : 6祖 慧能)의 맏제자(弟子). 즉 적법제자(嫡法弟子)란 뜻.

    34. 東山之法:동산(東山)은 중국 기주(蘄州 湖北省)에 위치. 4조도신(祖道信)과 5조홍인(祖弘忍)이 모두 이 산에 주석(住錫)하였으므로 그의 법통(法統)을 가리킴(「昌原 鳳林寺 眞鏡大師碑文」 과「海州 廣照寺 眞澈大師碑文」 등 참조).

    35. 慈忍禪師:월광사(月光寺) 원량선사(圓朗禪師)의 사형(師兄)으로서 당(唐)에 유학한 바 있으며, 대통(大通)에게 월광사(月光寺) 주지(住持)를 청할 정도로 대통(大通)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6. 摳衣之禮:「長興 寶林寺 普照禪師碑文」 과「忠州 淨土寺 法鏡大師碑文」 ,「長湍 五龍寺 法鏡大師碑文」 등 참조).

    37. 甁非甁時如何:병이 병이 아닐 때 어떠합니까.

    38. 什摩:십마(什麽)라고도 기록함. 심마(甚麽), 심저(甚底), 심적(甚的)이라고도 하니, 무슨 물건, 또는 무엇이냐 라는 의문사.

    39. 阿誰:옥수라 음독(音讀)하니, 누구란 뜻.

    40. 理窟:진리의 굴택. 즉 진리는 현묘(玄妙)하여 쉽게 알 수 없으므로 깊은 굴속에 묻혀 있다는 형용.

    41. 靑出於藍云云:「河東 雙谿寺 眞鑑禪師碑文」 참조.

    42. 신라 때 승관(僧官). 신라시대 가장 높은 승직(僧職)이니, 지금의 종정(宗正)과 같음. 고구려에서는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신라에서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국통이 되었다.

    43. 萍跡:평종(萍踪), 평적(萍迹) 등과 같은 뜻. 부평초의 자취. 이곳저곳으로 떠돌아 다녀 일정한 주처(住處)가 없음을 비유한 말. 모융(牟融)의「有感詩」에 “十年飄泊如萍跡”이라 하다.

    44. 위치미상

    45. 丹誠蹔因:지극한 정성에 못 이겨 잠깐 동안 주석하였다라는 뜻.

    46. 경사(京師)와 같은 뜻이니, 장안(長安) 또는 서울을 가리킴.

    47. 수제자(首弟子)라는 뜻.

    48. 작술(詐術)을 사용하여 사람을 우롱하는 것이니, 춘추시대(春秋時代) 송(宋)나라의 원숭이를 사육하는 사람이 사료(飼料)인 도토리(若茅)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하니 원숭이들은 모두 일어나 화를 냈으나, 주인이 ‘그렇다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씩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은 함께 일어나 기꺼워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 셋, 저녁에 네 사람씩 오고 가는 사람이 끝없이 많이 찾아온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

    49. 헌강(憲康)이라고도 함. 신라 제49대 임금(875~886).

    50. 임금의 조서(詔書).

    51. 중사성(中事省)의 오기(誤記)라고 생각되는데, 중사성(中事省)은 국왕 직속의 그것과 동관(東官) 직속의 그것이 따로 있었으며, 국왕이나 왕태자(王太子)에 대한 시종(侍從)의 임무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고(詔誥)를 전담하는 등 문한(文翰)을 장악한 관부(官府)였다. 원래 이름은 세택(洗宅)이었다가 경덕왕 때 중사성(中事省)이라 고쳤으며, 국왕 측근의 근시기구 중 하나였다.

    52. 定康王:신라 제50대 임금(?~887).

    53. 喪亂:정강왕(定康王 : 헌강왕의 형)의 죽음이 상(喪)이고, 헌강(憲康)의 재위중(在位中)에 일길찬(一吉飡) 신홍(信弘)의 반란(反亂)을 난(亂)이라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당시 왕실(王室)과 정국(政局)이 매우 어지러웠다는 말.

    54. 민중봉기 또는 난리, 소란 등의 뜻.

    55. 당(唐)의 소종년호(昭宗年號).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891).

    56. 眞聖大王御宇之二年: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

    57. 동궁(東宮) 소속의 내양(內養). 즉 근시사인(近侍舍人)으로서 안처현(安處玄)이 바로 동궁(東宮) 직속의 중사성(中事省) 소속 관원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昌原 鳳林寺 眞鏡大師碑文」『金石總覽』 上, 에서도 중사성내양(中事省內養)인 김문무(金文式)을 보내어 심희(審希)를 왕경(王京)에 초치(招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8. 경기도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있었던 고을. 지금의 음성일대(『新增東國輿地勝覽』 卷8, 陰竹縣條 참조).

    59. 進禮郡:전라북도 금산군의 옛 이름.

    60. 斗暗:검은 구름이 덮여 갑자기 컴컴해지는 상태.

    61. 逡巡:준순(逡循) 또는 준둔(逡遯)과 같은 뜻이니, 뒤로 물러나는 것. 『史記』 秦始皇紀에 “逡巡遁逃而不取進”이라 하다.

    62. 勢慈:관세음보살의 위대한 자비(慈悲)의 힘.

    63. 좀 도둑. 초야에 숨어있는 도적. 『舊唐書』 僖宗紀에 “率合義徒하여 驅除草寇”라 하고,「六部成語」에는 “草野之中에 盜賊發起也”라 하다.

    64. 星夜:별이 보이는 동안. 즉 야간(夜間)을 가리킴.

    65. 倍程:걸음을 재촉하여 평소보다 길을 배(倍)나 더 걸었다는 뜻.

    66. 武府:무부(武夫)라고도 함. 무부현(武夫縣)을 가리킴이니, 지금의 공주지방(公州地方). 혹시 무주(武州)인 광주지방(光州地方)이 아닌지 모르겠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17, 新豊廢縣條 참조).

    67. 大王聞云云:대왕(大王)은 진성여왕.

    68. 無量靈神: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

    69. 當州:무부현(武府縣).

    70. 芬嶺:분령(分嶺)이라고도 함. 전남(全南) 낙안현(樂安郡)의 옛 이름.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고쳤음(『新增東國輿地勝覽』 卷40, 樂安郡 建置沿革條).

    71. 惠遠居廬阜之日云云:혜원법사가 려산(廬山) 동림사(東林寺) 반약대(般若臺)에서 도속(道俗) 123명과 함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가질 때 진(晋)의 왕이 극진히 존중(尊重)하였다는 말(『梁高僧傳』 卷6:大正藏 卷50, p.357 下段).

    72. 僧稠在龍山之時:552년에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가 명하여 업성서남(鄴成西南) 용산(龍山)에 정사(精舍)를 지어 운문사(雲門寺)라 이름 짓고, 승조선사(僧稠禪師)를 여기에 있게 하였다(『續高僧傳』 卷16, 釋僧稠傳:大正藏 卷50, p.554 中段).

    73. 진(晋)나라 출신. 자(字)는 원도(元度).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산택(山澤)을 유람하는 승정(勝情)이 있었다.

    74. 許詢之師於支遁:허순이 지둔(支遁)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말. 지둔(支遁 : 314~366)의 자(字)는 도림(道林), 속성(俗姓)은 관씨(關氏), 진류(陳留) 출신. 도덕이 고매하여 허순(許詢),왕치(王治), 유회(劉恢), 은호(殷浩), 진초(郗超), 손작(孫綽) 등 명사(名士)가 모두 스님을 존경하였다(『梁高僧傳』 卷4, 支道林傳:大正藏 卷50, p.348 中段).

    75. 진(晋)나라 의양(義陽) 출신. 자(字)는 차륜(次倫). 전술(戰術)에 뛰어난 명장(名將)이다. 흥녕연간(興寧年間 : 363~365)에 양주(梁州) 자사(刺史)가 되어 양양(襄陽)을 진압하였으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서 패하였고, 견(堅)은 사석(謝石)에게 패배당했다.

    76. 『梁高僧傳』 卷5:大正藏 卷50, p.35 下段.

    77. 강을 건너는 나루터의 교량이라는 뜻.

    78. ①약(藥)은 약재. 석(石)은 약재가 돌로 되었다는 말. 전(轉)하여 약재의 총칭. 『列子』 湯問에 “盧子曰 汝疾不由天 亦不由人 亦不由鬼 禀生受形 旣有制之者矣 亦有知之者矣 藥石其如汝何”라 하다. ②병을 치료한다는 의미. 스님들은 계율(戒律)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이므로 부득이 위율(違律)을 피하여 약으로 먹는다는 뜻으로서 약석(藥石)이라 한다. 『黃檗淸規』에 “藥石晩食也 比丘 過午不食 故晩食名藥石 爲療饑渴病也”라 하였다.

    79. 乘桴:뗏목(筏)을 타고.

    80. 落拓:낙탁(落托)이라고도 함. 호방(豪放)하여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않는 기상. 『北史』 楊素傳에 “少落拓有大志하여 不拘小節”이라 하다.

    81. 西笑:중국 관동지방(關東地方)의 속담이니, 사람들이 가장 문물(文物)이 발달되고 화려한 서울인 장안(長安)이 살기 좋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서쪽을 향하여 희망과 선망의 웃음을 띤다는 말. 여기서는 당시 선진국(先進國)인 중국을 지칭하는 말(「藍浦 聖住寺 朗慧和尙碑文」 참조).

    82. 西國:중국을 지칭함.

    83. 경기도 남양(南陽)의 옛 이름(『新增東國輿地勝覽』 卷9 南陽都護府 建置沿革條 참조).

    84. 서해안(西海岸) 당성군내(唐城郡內)의 해변.

    85. 大王尋遣:대왕(大王)은 진성여왕을 지칭함.

    86. 강원도 평강군(平康郡)의 고구려 때 이름.

    87. 薛藺之邀:『金石全文』에는 설간지요(薛簡之邀)로 되어 있는데, 6조혜능(祖慧能)이 조계(曹溪)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선양하자 당시 조정에서 중궁(中宮) 설린(薛藺)을 보내어 왕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혜능은 병을 핑계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함(『宋高僧傳』 卷8, 唐韶州今南華寺慧能傳:大正藏 卷50, p.755 上段).

    88. 周豊之懇:출처는 미상(未詳)함.

    89. 天竺拘尸之法:인도의 구시나가라에서 불신(佛身)을 화장(火葬)하였다는 뜻으로 화장하는 장례법을 뜻함.

    90. 茶毘:ꇁjhāpeti의 음역. 도유(闍維) 또는 도비(闍毘)라고 하는데, 화장(火葬)이라는 뜻.

    91.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장소이니, 화장한 장소를 뜻함.

    92. 鷰栖幕:제비집.

    93. 사리(舍利)를 가리킴.

    94. 신라의 정강왕(定康王), 진성여왕(眞聖女王), 효공왕(孝恭王) 등 삼조(三朝)를 말함.

    95. 風竅:큰 고목(古木)의 구멍을 통해 바람이 지나가면 우렁찬 소리가 남을 뜻함이니, 스님의 선법(宣法)하는 위엄(威嚴)이 그와 같다는 말.

    96. 열반 직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화장하고 임시로 석성(石城)을 쌓아 사리(舍利)를 봉안해 둔 곳.

    97. 抗表:상표(上表)와 같은 뜻이니, 진정서(陳情書)를 임금에게 올리는 것.

    98. 孝恭大王:신라 제52대 왕.

    99. 漳濱:지명(地名). 중국 호북성(湖北省) 당양현(當陽縣)의 동북지방(東北地方). 곧 죽었다는 뜻이니, 촉한(蜀漢) 때 관우(關羽)가 보맥성(保麥城)을 지키기 위해 거짓 항복(降伏)하고 도망가다가 여기서 그의 아들 평(平)과 함께 반장(潘璋)에게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100. 莊壑:장(莊)은 장(藏)의 오자(誤字)이니, 장학(藏壑)이란 “夫藏舟於壑하며 藏山於澤하고는 謂之固矣”라 하였으니, 『莊子』 大宗師篇에 어떤 사람이 배를 산학(山壑)에 감추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그 산을 택중(澤中)에 옮겨 놓고서야 이젠 안심(安心)이 된다고 하였으나, 밤중에 힘이 센 역사(力士)가 택중(澤中)의 산까지 짊어지고 가버린 데서 온 말이니, 이 세상에서 영원하거나 견고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비유임(「榮豐 境淸禪院 慈寂禪師碑文」 참조).

    101. 향진(香塵)과 같은 말. 장사 때의 향기(香氣)가 가셨다는 뜻이니, 장사, 49재 등 다비(茶毘)에 따른 모든 행사(行事)가 끝이 났다는 말. 『文選』의「謝莊月賦」에 “綠苔生閣하고 芳塵凝樹”라 하다.

    102. 정민(貞珉)과 같은 뜻이니, 비석을 지칭함.

    103. 鶴唳:학이 우는 소리이니, 학이 우는 그 소리는 처예(凄銳)하고 또한 청아(淸雅)하므로, 전(轉)하여 처량하고 애절한 문장(文章)을 가리킴.

    104. 탄조(呑鳥) 또는 탄봉(呑鳳)과 같은 뜻(「忠州 淨土寺 法鏡大使碑文」 참조).

    105. 망양기로(亡羊岐路)의 준말(「聞慶 鳳巖寺 智證大師碑文」 참조).

    106.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에서 온 말이니, 훌륭한 문장(文章)을 말함.

    107. 但憂於傷手:도목수(都木手)가 없을 때는 소목수(小木手)가 손을 다칠까 두려워하여 능히 도끼를 들지 못한다는 말이니, 변변치 못한 유사(儒士)가 감히 덕이 높은 스님의 비문(碑文)을 쓴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는 말(「聞慶 鳳巖寺 智證大師碑文」 과「砥平 菩提寺 大鏡大師碑文」 등 참조).

    108. 柔翰:붓의 다른 이름. 또는 세필(細筆)이니 작은 붓(「砥平 菩提寺 大鏡大師碑文」 참조).

    109. 詵詵:화합(和合) 또는 중다(衆多)의 뜻. 애굉(哀宏)의「三國名臣序贊」에 “詵詵衆賢은 千載一遇”라 하다.

    110. 오산(鼇山)으로도 적음(「長興 寶林寺 普照禪師碑文」 참조)

    111. 암라수원(菴羅樹園)이니 인도(印度) 비야리성(毗耶離城)에 있는 사원(「長湍 五龍寺 法鏡大師碑文」 참조).

    112.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碑文」 음기(陰記)에 보이는 원주대덕(院主大德) 능선(能善)과 동일인 것으로 보인다(『金石總覽』 上, p.98).

    113. 弘㑣大德:㑣은 어리석을 람 자(字).

    114.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 : 821~898)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와 동일인(同一人)으로 추정된다(「光陽 玉龍寺 洞眞大師碑文」, 『金石總覽』 上, pp.189~194 참조).

    115.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둘째 아들로서 후에 정종(定宗)이 됨.

    116.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로서 후에 광종(光宗)이 됨.

    117.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제23비(妃)인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의 아버지.

    118.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제8비(妃)인 정목부인(貞穆夫人)의 아버지.

    119.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공주(公主) 혹은 옹주(翁主)였을 것으로 추측됨.

    120.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 “松岳郡 太守大奈麻 臣 金鎰”이라고 보이며,「藍浦 聖住寺 朗慧和尙碑文」에도 “菩薩戒弟子 武州都督蘇判鎰”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은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서 송악군 태수와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판(蘇判)은 진골귀족(眞骨貴族)들만 오를 수 있는 제3관등임.

    121. 충주(忠州) 유씨(劉氏)로서 태조(太祖)의 제3비(妃)인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의 아버지이며, 왕요군(王堯君)과 왕소군(王昭君)의 외조부(外祖父)이기도 함.

    122. 광주지방(廣州地方)의 대호족(大豪族) 출신으로 태조(太祖)의 제15비(妃)인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과 제16비(妃)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그리고 혜종(惠宗)의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이 그의 딸이었다. 후에 혜종(惠宗)을 몰아내고 자기의 외손자를 왕으로 세우려고 두 차례에 걸쳐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좌승(佐承)은 3품(品)에 해당하는 관계(官階)임.

    123. 『金石總覽』 上, p.127에 전시중(前侍中) 권설(權說)과 p.167의 유권설좌승(劉權說佐承) 등을 충주(忠州) 유씨(劉氏)인 권설좌승(權說佐承)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124. 왕렴좌승(王廉佐承) 김순무(金順式)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하여 왕씨성(王氏姓)을 사성(賜姓)받고 렴(廉)으로 개명(改名)하였는데, 이전 이름은 김장명(金長命)이었다(『高麗史』 卷 92, 王順式傳 참조).

    125. 元甫:제4품에 해당하는 고려의 관계(官階)임.

    126. 金休長史:비 앞면에 나오는 공주(公州)의 장사(長史) 김공휴(金公休)로 짐작됨.

    127. 고려 태조(太祖) 때 안정진(安定鎭), 통해진(通海鎭) 등에 성 쌓는 일을 주관한 인물임(『高麗史』 卷82, 兵志2, 鎭戌項 太祖條 참조).

    128. 元尹:제6품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관계(官階)임.

    129. 正衛:제7품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관계(官階)인데, 정좌(正佐)로도 쓴다.

    130. 與一:「砥平 菩提寺 大鏡大師碑文」의 음기(『金石總覽』 上, p.134)에 재가제자(在家弟子)중의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올라있다. 정조(正朝)는 제7품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관계(官階)임.

    131. 竹州:경기도 죽산군(竹山郡)의 고려 초 때 이름(『新增東國輿地勝覽』 卷8, 竹山縣條 참조).

    132. 提州:충북 제천군(堤川郡)의 고려 초 때 이름(『新增東國輿地勝覽』 卷14, 堤川縣條 참조).

    133. 酒淵縣:강원도 원주(原州)의 고구려 때 이름(『新增東國輿地勝覽』 卷46, 原州牧의 屬縣 참조).

    134. 신라 말 해인사(海印寺)에서 화엄종(華嚴宗)의 북악파(北岳派)를 대표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이 되었던 희랑조사(希朗祖師)와 동일한 스님이 아닐까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