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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海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1 대광(大匡) 밀성군 박공(密城君 朴公)2의 부인 김씨는 광주(光州)사람이다. 옛날 사공(司空) 김길(金吉)이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 몇 대 뒤 후손인 대장군 경량(鏡亮)은 부인의 증조가 된다. 문하시중 수(須)를 낳았고, 시중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은퇴한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남 2녀를 두었다. 부인이 가장 막내이다. 선부의랑(選部議郞) 광식(光軾)은 이복 오빠이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과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의 부인, 급제한 광락(光輅)은 모두 친형제이다. 외할아버지는 낭장 왕정조(王丁朝)3로 효은태자(孝隱太子)4의 후손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맑으며 더하여 어진 아버지와 형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나이 약간에 박씨에게 시집와 부인의 행실을 닦으니 세족(世族)의 귀함에도 불구하고 실오라기만큼의 거만한 빛이 없었다. (남편인) 대광공 또한 예절을 좋아하는 군자로서 평상시에도 서로 공경하여 손님을 대하듯 했다. 부인은 평생 부모를 효도로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손을 고르게 사랑하고 노비와 하인에게 은혜롭게 하였다. 밤에는 불경을 읽고 낮에는 베를 짰는데 나이가 들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의복과 음식은 또 반드시 풍요함과 검소함의 중도에 맞게 하였다. 어머니 왕씨(王氏)는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군대부인(郡大夫人)에 봉해져, 해마다 녹을 받았다. 부인도 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왕씨와 같은 은택을 받았고 녹은 더 많았다. 하루는 서로 ‘우리 한 집안에 두 부인은 나라에 보탬도 없으면서 두터운 은혜를 입으니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부인의)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았다. 아들이 다섯이다.5 큰아들 밀양(密陽)6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이다. 둘째 대양(大陽)7은 봉익대부 전법판서 보문각제학 상호군이고(奉翊大夫 典法判書 寶文閣提學 上護軍)이다. 셋째 소양(紹陽)8은 성균시를 본 후 (원나라) 수도에 갔다가 운남(雲南)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넷째 삼양(三陽)은 정언(正言)이었다. 언사(言事)로 계림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공무로 죽었다. 다섯째 계양(啓陽)9은 중정대부 비서감(中正大夫 秘書監)이다. 죄가 아닌 것으로 폐인이 되니 세상 논의가 안타깝게 여겼다.10 손자는 남녀 10여 명이다. 밀양은 장경공 유돈(將敬公 柳敦)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인 낭장 경무(敬茂)와 판사재(判司宰) 경인(敬仁)과 네 딸을 낳았다. 별장 구희(具禧)와 중낭장 박침(朴忱), 청주판관(淸州判官) 장연(張縯)이 그 사위이다.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대양은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첩(外室)에게서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좌우위 녹사참군이다(左右衛 錄事參軍)이다. 계양은 전주목사 홍만용(洪萬龍)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은 남녀 내외로 합하여 10여 명이다. 아아, 부인의 덕행이 그와 같고 자손의 많고 귀하게 현달함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덕이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복을 누린다’는 것이 옳도다. 부인은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 대광공과 함께 밀성(密城)으로 난리를 피하였다가 그곳에 살았다. 나이 73세인 홍무(洪武) 갑인년(공민왕 23, 1374) 8월 기해일에 돌아가셨다. 그 달 신축일에 수산현(守山縣) 구명산(九明山)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막내아들(계양)이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지금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 살이 하면서 나에게 편지와 가장(家狀)을 보내며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부인을) 위하여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에 이르기를, 대대로 내려오는 세가에 나 아름다운 덕이 뛰어났고 위의를 삼가 예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군자에게 시집가 훌륭한 자식 집에 가득하니 어머니는 아들로 귀하여져 봉작과 녹으로 영화롭다. 나이 일흔셋 호상(好喪)이라 하겠는데 슬퍼하는 저 상주 묘 곁에서 피눈물 흘리네.

    1. 『포은문집』에 붙은 주에 의하면 원래 박의필(朴義必)의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2. 박윤문(朴允文).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의하면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원(朴原)이고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김태현 묘지명이 만들어진 충혜왕 원년(1330)에는 예문봉공(藝文供奉)이었고 충목왕 즉위년(1344)에 기거주(起居注)였다. 『高麗史』 권37 충목왕 즉위년 6월 을묘 “置書筵 以右政丞 蔡河中.....起居注 朴允文 起居郞 宋天鳳..... 判密直司事 李蒨..... 典理判書 閔思平 知申事 金光轍”.

    3. 원래의 이름은 왕정단(王丁旦)인데 조선초의 피휘에 의하여 단(旦)이 조(朝)가 되었다. 김태현 묘지명에는 왕단(王旦)으로 나온다.

    4. 태조의 아들로 역모를 도모했다하여 광종(光宗) 때에 사사(賜死)되었다. 그 아들들은 어려서 죽음을 면했다가 목종대 집권한 강조(康兆)의 건의로 왕실의 후손으로 다시 인정되었다.

    5. 『씨족원류』에는 박윤문의 아들로 6을 들고 여기에 나오지 않는 재양(載陽)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다른 것인지 착오인지 명확하지 않다.

    6.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의하면 이름을 린(僯)으로 바꾸었고 후에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박린(朴璘)과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7. 공민왕 9년 겨울에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왕을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이 되었다.

    8. 『씨족원류』에는 少陽이라고 하였다.

    9. 『씨족원류』에는 계양(季陽)으로 되어 있다.

    10. 이것은 아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高麗史』 세가 44, 恭愍王 23년 3월. 癸酉 前門下舍人朴啓陽 蒸妻母洪氏 事覺逃 訊其妻母乃服 杖之沒爲官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