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기록, 선명한 오늘

우리의 문화유산, 그 빛을 되찾다.

약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우리 문화유산의 모습을 AI 기술로 되살렸습니다. 『조선고적도보』에 남겨진 빛바랜 기록에는 그 시절의 아픔과, 오늘까지 지켜낸 문화유산의 옛모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흐릿한 흑백 사진 속에서 다시 선명하게 피어난 우리 문화유산을, 지금 만나보세요.

빛을 잃어가던 얼굴

토함산 중턱에는 통일신라 최고의 조각가들이 빚어낸 얼굴이 있습니다. 1910년대, 석굴암은 이미 오랫동안 방치되어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석굴암은 1913년 처음 수리를 시작하여 1915년까지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인 1960년대에도 온도와 습기 조절 문제로 목조 전실과 유리벽이 추가로 설치되어, 현재 관람객은 유리 너머로만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흐릿함 속에서 다시 선명하게

『조선고적도보』에 기록된 사진은 바로 그 해체수리 무렵의 모습입니다. 무너진 석재 더미와 노출된 본존불이 보이고, 석재 사이로 자란 풀들과 이끼들이 확인됩니다. 자세히 보면 입술에는 옅은 붉은 채색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원래 채색인지 후대에 다시 칠해진 것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석굴암

석굴암은 현재 국가지정 '중점 관리대상 문화유산'으로 온·습도와 석재 상태가 상시 모니터링되고 있습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문화유산 전문사진가 고(故) 한석홍 씨가 1981~2000년 세 차례에 걸쳐 촬영한 필름 1,172장을 유족에게 기증받아, 2020년 사진집 『석굴암, 그 사진』을 발간했습니다. 이번 업스케일링에 쓰인 『조선고적도보』 원본 자료 역시 연구원에서 운영하는 '국가유산 지식이음'을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부처의 나라

김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며 짓기 시작한 불국사는 '부처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 청운교·백운교는 무너지고 기운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무너진 석축과 계단만을 임시로 정비했습니다. 사찰의 회랑과 단청은 끝내 복원되지 못한 채, 반쯤 남은 폐허의 모습으로 이 시기의 사진 속에 남았습니다.

색을 입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으로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로,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AI로 사진 속 기울어진 청운교·백운교와 빛바랜 자하문의 흔적을 되살렸습니다. 지금은 담장이 복원되어 볼 수 없지만, 사진 속에는 자하문 좌우로 삼층석탑과 다보탑이 나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의 모습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통해 회랑과 전각 대부분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연구원은 다보탑과 삼층석탑 등 주요 석탑의 수리·복원 기법과 문화유산 연구를 진행한바 있으며, 2025년 중점관리 문화유산 모니터링을 통해 불국사 대웅전 부재 전반에 파손과 처짐 현상을 확인하였고, 2026년 말부터 본격적인 해체 수리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주인을 잃은 곳

창덕궁은 1405년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1610년에 다시 지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아픔을 겪기도 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ㆍ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습니다.

창덕궁

일제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기며 창덕궁과 종묘 사이가 갈라졌고, 여러 전각이 헐리며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1912년에는 인정전 등이 일반에 개방되며, 왕의 공간은 관람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한동안 방치되어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가 들어섰고, 본격적인 복원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창덕궁과 종묘에 쓰인 석재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석조문화유산 과학적 조사사업'을 진행하며, 중근세 궁궐 학술조사 연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아름다움

창덕궁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이 있습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습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입니다.

낙선재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인 순정황후 윤씨, 영친왕 이은, 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가 생활하다 세상을 떠난 곳입니다. 영친왕은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이방자 여사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입니다.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입니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조선 왕실의 문화 공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화홍문 일대는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소였습니다. 이후 1922년 화홍문은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32년에 복원 되었습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선덕여왕때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석탑입니다. 원래는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3층만 남아있습니다.

채색된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되어 반쯤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복원하지 못하고 남아있다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연구원에서는 1990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2004년~2012년에도 조사를 통해 분황사 가람배치 연구를 진행한바 있습니다.

반파된 미륵사지 석탑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사찰은 남아 있지 않고 석탑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입니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습니다.

벼락 맞은 석탑

미륵사는 탑과 금당을 하나씩 두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1금당 가람배치와 달리, 탑과 금당을 각각 세 개씩 배치한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사진 속 석탑은 이 세 개의 탑 가운데 서쪽에 자리한 탑입니다. 『삼국사기』에는 719년(성덕왕 18) 미륵사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사진 속 붕괴가 이 벼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AI로 무너진 석재의 질감과 균열을 사진에 담긴 그대로 컬러로 되살렸습니다

콘크리트로 보수된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의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한 응급조치로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습니다.

새롭게 보수된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현 국가유산위원) 심의 결과에 따라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연구원에서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에 6층까지 석탑 조립공정이 완료되었습니다. 2009년 해체 조사 당시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출토 되어 석탑의 건립시기와 미륵사 창건 주체가 밝혀졌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조선왕릉

조선 왕실의 상징과도 같던 능원 관리 체계는 일제강점기 들어 이왕직의 관리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왕직은 일본 궁내성 소속의 기구로 조선의 왕족과 재산, 제사, 행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능마다 배치되어 있던 능참봉 등 전통적인 수호 체계도 이 시기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능참봉: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을 관리하고 제사를 관장하던 종9품의 말단 관직

건원릉의 억새

태조 이성계가 잠든 건원릉에는, 고향 함흥의 흙과 억새를 옮겨와 봉분을 덮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진 속 봉분에도 잔디가 아닌 억새가 그대로 남아 있어, 이 이야기를 뒷받침합니다. 이 억새는 지금도 매년 한식 무렵 단 한 차례만 정리하며, 나머지 기간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두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광복 후 국가유산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관리하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현 문화유산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국가유산청 산하의 궁능유적 본부가 전담하여 관리, 보호하고 있습니다.

왕릉을 지키는 석물

조선왕릉에는 능침공간에 석물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석물은 사람 형태의 석인, 동물 형태의 석수 등이 있습니다. 석인은 문인, 무인 형태가 있고, 석수는 말, 호랑이, 양이 있습니다. 조선왕릉 석물은 봉분을 중심에 두고 능실에 안장된 왕과 왕비를 보호 할 수 있도록 겹겹이 둘러싸는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즉 명계에 있는 왕과 왕비를 물리적이자 상징적으로 보호 하도록 구성한 것입니다.

영릉의 문석인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잠든 영릉에도 문석인이 있습니다. 문석인은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채 홀(笏)을 잡은 형태입니다. 원래 영릉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고,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릉에 합장하였습니다.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면서 옛 능침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고, 능침 석물은 새로 만들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그렇게 새로 세워진 문석인이 오랜 세월 왕과 왕비를 지켜온 모습으로 서 있고, 그 발치에는 촬영 당시 이곳을 찾은 한 사람이 함께 담겨 있어 석물의 규모를 가늠하게 합니다.

흐릿했던 100년 전 기록이, 오늘 다시 선명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빛바랜 기록 속에서 되찾은 선명함처럼, 우리의 역사와 문화도 계속해서 기억되고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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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유산연구원 디지털문화유산연구정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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