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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인일기

개인일기 해제
한글서명 가정경술일기
한자서명 嘉靖庚戌日記
표제 및 권수제 표제 : 없음 권수제 : 嘉靖庚戌日記
저자 이교 李㝯(1531~1595)
판종 필사본
작성연대 / 간행시기 1550년(명종 5)
형태사항 1책(14장) / 가철 / 사주백변, 무계 / 항자수부정 / 31.2×24.3㎝
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개요
본서는 이교(李㝯, 1531~1595)가 부친 이해(李瀣, 1596~1550)의 옥사가 일어난 1550년(명종 5) 7월 16일부터 부친을 장사지낸 12월 11일까지 중요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보존상태는 그다지 썩 좋은 상태는 아니다. 일부 종이가 찢겨나가고 떨어진데다 첫 장 같은 경우 손 접촉으로 인한 보풀이 많이 일어 판독이 불가능한 것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특히 뒷부분의 3~4장은 훼손의 정도가 심하며 마지막 장은 누락이 있는 듯하다. 저자의 수사본으로 추정된다.
저자의 생애
본서의 피전자인 이해와 일기를 직접 기록한 이교를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이해(李瀣)의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온계의 조부인 계양(繼陽)이 처음으로 안동에서 예안으로 터를 잡았으며 부친은 식(埴), 모친은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조부와 부친 모두 진사를 지냈다. 
숙부인 송재(松齋) 우(堣)에게 아우 퇴계와 함께 훈도를 받았으며 1523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5년 뒤 1528년 문과에 급제, 이후 검열(檢閱), 정언(正言), 이조좌랑(吏曹佐郎), 응교(應敎),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543년 도승지(都承旨), 154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중국 사행을 다녀왔다. 이후 황해도․충청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연안김씨(延安金氏)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1772년(영조 48) 4권 3책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여섯 형제 중 막내인 퇴계와 지동도합(志同道合)하여 당세에 금곤옥우(金昆玉友)로 칭송되었고 또한 하남백중(河南伯仲)으로도 일컬어졌다. 일찍 문사(文辭)를 성취하였고 어렸을 적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송재에게 남다른 그릇이니 잘 보호하라는 말을 건넸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교(李㝯)의 자는 군미(君美), 호는 원암(遠巖)이다. 부친 해와 연안김씨 사이 5남 1녀 중 셋째 아들이다. 즉 위로 형 2명과 누이 1명, 밑으로 아우 2명이 있다. 숙부인 퇴계 이황에게 수학하였다. 음직으로 1578년(선조 11) 남부참봉(南部參奉)을 시작으로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을 지냈으며, 1589년(선조 22)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이듬해 대흥 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다. 초취初娶)는 황윤중黃允中)의 딸인 장수황씨(長水黃氏)이고, 재취(再娶)는 금응석(琴應石)의 딸인 봉화금씨(奉化琴氏)로 3남 1녀를 두었다.
『가정경술일기』의 구성과 체제
『가정경술일기(嘉靖庚戌日記)』는 단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550년(명종 5) 7월 16일부터 12월 11일까지의 기록이다. 매일의 기록이 아니라 날짜가 이어진 것도 있고 건너뛰고 며칠 뒤의 것도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의 중요상황을 적어 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끝에는 옥사와 관련하여 전체적 총평 및 1567년 융경원년(隆慶元年) 이해의 직첩을 되돌려주라는 내용의 글이 추기(追記)되어있다. 필사연대 추정은 이를 따른 것이다.
『가정경술일기』의 내용
본서의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사건 전체의 대강을 이해하기 위해 소위 충주옥사(忠州獄事)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1549년(명종 4) 온계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이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사사된 이약빙(李若氷)의 장남인 이홍남(李洪男)은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평소 사이가 나빴던 아우 이홍윤(李洪胤)을 역모죄로 고변하였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한 불평을 품고 충주의 몇 몇 인사와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를 한 것이다. 이에 충주는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고 이홍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다. 그 때 유신현의 수령이었던 이치(李致)와 감사였던 온계는 이홍남이 모친의 상중임에도 벼슬을 받고 몰수된 아우 홍윤의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찾아가자 그를 천하게 여기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일로 이홍남은 그들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유신현에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의주의 유배지에서 도망쳐 와 이홍남이 이홍윤을 고변하여 귀양에서 풀려나고 관직에까지 오르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여 고변할 것을 꾀하였다. 그래서 유신현 품관(品官)들의 향회문자(鄕會文字)를 몰래 들고 나와 서울로 가 역적의 잔당들이라고 무고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유신의 나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당시 유신현의 수령이었던 이치는 이를 감영에 보고하여 신문하기를 청했고 감사였던 온계는 법에 의거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최하손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런 사실을 두고 평소 온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강력하게 그의 청죄를 요구하였다. 그 중심에 이기(李芑)와 이무강(李無彊)이 있었다. 1545년(인종 1) 온계가 대사헌의 자리에 있으면서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인 이기가 우의정으로 등용되려고 하자 이치와 함께 탄핵하여 저지한 일이 있었고, 이일로 이기는 온계와 이치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무강의 경우 이기를 믿고 세력을 부리며 이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던 그를 비루하게 여기고 상대하지 않음에 온계에게 유감을 품게 되었다. 이홍남은 처남인 원호변(元虎變)을 통해 최하손의 일을 이무강에게 말하였고 이에 이무강은 양사를 충동하여 온계를 탄핵하였다. 충주옥사에서 죄인의 몰수 재산을 사사로이 누락시켜 되돌려주었다는 것과 최하손을 장살하여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는 것 등을 죄목으로 거론하며 역적을 비호했으니 역적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1548년 대사헌으로서 이기를 탄핵하다 삭직, 유배된 뒤 1550년 사사된 구수담(具壽聃)과 붕비(朋比)라고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온계는 이치와 함께 금옥에 갇히게 되어 국문을 받았다. 혹독한 고문 끝에 이치가 먼저 장살되고 온계는 갑산(甲山)으로의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양주(楊州) 민가에서 55세로 작고하였다.    
  『가정경술일기』의 날짜별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7월 16일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兩司)에서 아뢴 내용이 헌부(憲府) 서리 임은손(林隱孫)을 통해 온계에게 전해지다. 그 내용은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시 충주 역당을 추쇄첩보(推刷牒報)하면서 노비와 전답을 누락하여 본 주인에게 되돌려 준 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 추고치죄(推考治罪)를 청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온계는 식구들을 돌아보며 예전에도 이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잘 넘어 갔었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듯 하다고 말하다.
  ○ 7월 17일 
  충청감사시 도사(都事)로 있던 류섭(柳涉)을 만나 당시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도사와 상의하여 모두 법에 의거 처리했고 자질구레한 잡물들은 관가에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담당 관리에게 폐만 된다고 생각하여 목록을 지웠다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 답변하면 된다는 류섭의 말을 따라 세 차례 해명의 답변서를 제출하였다. 사간원에서 유신현 영리(營吏) 석구(石球)로 하여금 문안(文案)과 서목(書目) 등을 가져오게 했다.
  ○ 7월 22일
  석구가 문안을 가지고 온계집으로 바로 찾아가니 온계는 자신을 찾아온 그를 나무라고 곧바로 사헌부에 올리라고 하였다. 사헌부에서 재삼 문서를 살폈으나 환급(還給)에 관한 문서가 없어 당시 일을 했던 석구를 잡아 물었지만 석구는 자신은 모르는 바라고 하였고 이에 그를 하옥시켰다. 사헌부에서 충청도 감사와 유신현에 환급서목을 찾아 보내라고 문서를 보냈다.
   ○ 7월 23일
  20일 밤 천변이 일어난 것에 대해 이기가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이 일을 제대로 못하여 일어난 재변이니 자신을 체직시켜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를 온계가 보고는 이기의 전횡을 비판하였다.
   ○ 7월 24일
  저자[이교]의 장인인 황윤중이 사촌간인 대간 원계검(元繼儉)을 찾아가 온계의 일을 이야기하며 구제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와 저자에게 전하자 저자는 부친인 온계에게 다시 이 말을 전하였다. 온계는 송세형(宋世珩)과 원계검은 자신과 평소 사이가 좋기는 하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라 자신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 7월 25일
  김구사(金九思)가 와서 송세형이 온계가 자신을 찾아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찾아가 보기를 권하였다. 온계는 그를 찾아가는 것은 구차한 일이 되기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 7월 29일
  석구의 아들인 석호겸(石好謙)이 와서 어제 저녁에 유신현 문서가 사헌부에 도착했으나 환급서목은 없었다고 하였다. 이번의 문서가 올라와 자신의 아버지의 혐의가 풀렸다고 하였고 온계 또한 그 내용에 공감하였다.
  ○ 8월 2일
  충청감사가 보낸 문안을 양사가 모화관(慕華館)에서 보았으나 전민환급(田民還給)에 관한 것은 없고 다만 기타 잡물을 효주(爻周)한 장부뿐이었다. 모두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으나 이무강 혼자 티끌만한 것도 놓칠 수 없다고 하였다.
  ○ 8월 3일
  의금부에 하옥하라는 전지가 내렸다. 그전에 그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식구들이 놀라고 울었지만 온계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 8월 4일
  사헌부에서 궁추(窮推)하여 정죄(定罪)하라는 전지가 내렸다. 또 양사는 전 청홍도사 유섭과 전 유신현감 이치 등을 하옥하여 궁추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 
  ○ 8월 5일
  온계 자신의 혐의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하는 원정(元情)을 올려 억울함을 밝혔다.  
  ○ 8월 6일
  이치를 잡아 의금부로 데려왔다. 당상에서 의금부 단독으로 온계를 추문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이야기를 하여 삼성교좌(三省交坐)하는 것이 가하다는 전지(傳旨)가 와 관련 인사들이 구성되었다.
  ○ 8월 7일
  온계와 이치에게 원정 내용을 추문하였으나 모두 불복하여 두 번의 장형(杖刑)을 받았다.
  ○ 8월 8일
  세 번째 장형을 받고 난 뒤 임금이 시추조율(時推照律, 형벌을 가하지 않고 법률에 비추어 죄를 적용하는 것)하라는 명을 내렸다. 추관이 사형죄인에게 그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 함에 그렇다면 내일까지 기다리라는 전지를 내렸다. 온계의 아들이며 저자의 형인 영(寗)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 8월 9일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온계에게 승복(承服)할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추관도 심문에서 서명을 하게 하였으나 거부하여 한 차례 장형을 받았다.
  ○ 8월 10일
  이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승지가 전하자 임금이 특명을 내려 사죄를 감하라고 하였다. 의금부가 장형 일백(一百)에 배소를 갑산(甲山)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유섭에게는 장형(杖刑)을 내리고 전라도 모처로 유배케 하였다.
  ○ 8월 11일
  의금부 도사 우언겸(禹彦謙)이 사람을 시켜 출발을 독촉하자 경비가 마련되지 않아 갑자기 떠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날 저녁부터 신기(身氣)가 평안치 못하였다. 
  ○ 8월 12일
  도사가 다시 서리를 시켜 출발을 독촉하여 부득이 말이 끄는 교자(轎子)로 출발하였다. 5리쯤 갔을 때 잠시 쉬었는데 상태가 점점 나빠 저자가 자연즙(自然汁)과 소합원(蘇合元)을 올렸다. 온계의 사위인 최덕수(崔德秀)가 부족한 행구(行具)를 많이 보태 주었다.
  ○ 8월 13일 
  몸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아 출발하지 않고 머물렀다. 삽기(啑氣)[병명]가 무시로 출몰함에 부친과 큰 형님도 이로 인해 돌아가셨음을 상기하며 목숨을 기약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말씀을 더듬고 숨이 점점 가빠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양사가 연달아 계(啓)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8월 14일
  사경(四更)에 작고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양사가 처음으로 정계停啓하였다.
  ○ 8월 15일
  관재(棺材)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마땅하지 않았다.
  ○ 8월 16일
  성무(成茂)와 억척(億斥) 등이 예안에서 와 온계의 아우인 찰방(察訪) 징(澄)과 풍기군수 황(滉)이 만약 형님이 큰일을 당하면 형편상 부득이 용권(用權)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였다. 저자의 형님이 이도사에게 용권은 자식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으나 이도사는 지금은 부득이한 상황이라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게 되었다.  
  ○ 8월 20일
  발인하여 배에 올랐다.
  ○ 8월 26일
  작은아버지 찰방공이 오셔서 곡을 하였다.
  ○ 8월 27일
  육지에 내렸다.
  ○ 8월 28일
  저녁에 장림(長林)에 도착하였다.
  ○ 8월 29일
  죽령을 넘어 영천(榮川) 외곽에 다다르니 몇 몇 사람이 와서 곡을 하였다. 삼경(三更)에 흑석(黑石)에 이르러 조모(祖母)댁에서 노전(路奠)을 드렸다.
  ○ 9월 1일
  풍기 작은아버지인 황을 비롯해 식구들이 곡을 하였다. 저녁에 온혜(溫惠)에 도착하였다. 
  ○ 9월 3일
  성복(成服)하였다.
  ○ 12월 11일
  연곡(燕谷) 경좌(庚座)에 장사지냈다.
『가정경술일기』의 가치
『가정경술일기』의 가장 큰 의미는 소위 이해 옥사에 대한 시말을 그의 아들인 이교가 직접 기록한 글이란 점이다. 이 일기를 통해 당시 사건의 전후 상황과 진행을 확대경으로 보는 것처럼 일자별로 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과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다. 즉 보사적(補史的)인 사료로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자료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일기와 크게 변별되는, 본서의 미덕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와 함께 이해를 둘러싼 혈연들의 동향 및 정보, 그리고 당시 유배 과정 등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이교 지음, 『경술일기』(한국국학진흥원 화상 제공)
이해 지음, 이익성 역 『국역온계전집』, 1979, 연곡간행소.
이교 지음, 『경술일기』(한국국학진흥원 화상 제공) 이해 지음, 이익성 역 『국역온계전집』, 1979, 연곡간행소.
이교 지음, 『경술일기』(한국국학진흥원 화상 제공) 이해 지음, 이익성 역 『국역온계전집』, 1979, 연곡간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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