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파사성(驪州婆娑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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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사적.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8번지 일원과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산43번지 일원 경계의 파사산(해발 235m) 정상에 위치한다. 유적은 남한강변의 해발 30∼40m 정도의 나지막한 평지 가운데 우뚝 솟은 파사산에 위치하고 있어 해발고도는 높지 않으나 주변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특히 산 밑을 감아 도는 남한강유역을 감제하기에 유리한 지역이다. 아울러 파사성에서 북쪽으로 약 2㎞ 부근에는 지금은 그 터만 전하는 이포나루가 있어서 이 지역이 남한강의 수운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변의 육상교통로는 충주에서 시작하여 여주-양평-서울로 이어지는 남한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이러한 육상과 하천교통로는 중부내륙지역과 서울, 그리고 황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이며 파사성은 이 중간에 위치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80∼112년)때 축성되어 파사성이라고도 하며 고대 파사국(婆娑國)의 옛터가 있어 파사성으로 불린다고 전하나 문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성에 관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초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여주의 북방 53리에 있으며, 둘레가 38,825척의 석축으로 이미 ‘고산성(故山城)’이라 기록되어있다. 이후,『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선조 28(1595)년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군(僧軍) 의암(義巖)을 도총섭(都總攝)으로 임명하여 둘레 1,100보의 산성을 수축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의암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에는 둔전을 마련하여 군량미를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군을 동원해 수축하여 1597년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후에도 파사성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1656), 『여지도서(輿地圖書)』(1760),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70), 『대동지지(大東地志)』(1862), 『여도비지(輿圖備志)』(1894∼1864) 등 각종 지리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한편 유성룡(柳成龍)의 시문집인『서애집(西厓集)』에는 “임 진왜란 시 경기방어사 변응성이 파사성을 수리하여 도성의 상류를 견고히 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역사가 방대하여 이루지 못하다가 황해도 승군총섭 의암으로 하여금 유승을 모아 수축케 하여 1595년에 수리를 마치고 금강루를 지어 배, 군기를 갖추고 엄연한 관방을 이루었다.”고 파사성의 수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초축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존재하였던 성을 수도방위의 한축으로 여겨 유승을 동원하여 수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사성은 파사산의 정상부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936.5m이고 내부면적은 약 3,966.9㎡이다. 평면형태는 삼태기형을 기본으로 하였다. 성벽은 내·외협축으로 축성되었는데 초축 성벽과 수축 성벽으로 나뉜다. 초축 성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ㄱ’자형과 단면 삼각형의 기단보축 등 2가지 방법의 기단보축이 확인된다. 이러한 보축방법의 차이는 수축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저부 위의 성벽은 두께 10∼15㎝로 치석한 장방형 석재를 면석으로 사용하여 바른층 막힌줄눈쌓기를 하였다. 수축성벽은 초축 성벽이 허물어진 곳에 부정형 할석의 치석한 면을 면석으로 사용하고 빈 공간에는 쐐기돌을 박아 넣었다. 수축성벽은 축조법이 약간씩 달라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존 성벽의 최고 높이는 6.5m, 상단 폭은 3.25∼7.2m이다. 내벽의 경우도 외벽과 같은 축조방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으며, 지형에 따라 0.5∼5m 가량 쌓았다. 현존하는 성벽의 최고 높이는 약 6.5m이고, 상단 폭은 3.2∼7.2m이며, 하부 폭은 10m 내외이다. 성내 시설물은 문지 2개소, 포루 3개소, 우물지와 수구지, 그리고 곡성지 각 1개소, 추정 건물지 8개소 정도이다. 이 중 동문지와 포루 2개소, 곡성지 그리고 몇 개의 건물지가 성벽과 함께 발굴되었다. 먼저 동문지는 성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의 하나로 방형의 옹성이 구비된 개방형 문지이다. 기단부에 2회 이상의 수축 흔적이 있으며, 기단석 하단에 1단의 석렬이 축조되었는데 상면에는 나말여초로 편년되는 기와편이 깔려 있으며 하단에는 반원형의 석렬 1단이 다시 돌아간다. 포루는 기존에 치로 알려진 구조물로서 남벽과 북벽에서 조사되었다. 모두 방형의 상면구조를 가졌으나 하부구조는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확인된다. 남포루는 능선의 경사면을 정지하고 일정 높이까지 성토한 후 그 위에 할석으로 기단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기단위에는 10㎝ 가량 물러 5단의 석축구조를 축조하여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남포루의 전면은 생토를 평평히 정지한 후 장방형 석재를 비스듬히 경사를 두어 쌓은 뒤 그 위에 장방형 석재를 안쪽으로 조금씩 물려 쌓아 방형으로 축조하였다. 특히 남쪽의 방형 단은 서벽의 기단보축과 연결되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북포루는 양평 방향을 경계하도록 9.4∼11×7.9∼7.8×1.7m 크기로 축조되었는데 상면은 크게 전면과 후면으로 양분된다. 전면은 장방형 석재를 놓고 그 사이에 할석재를 깔아 바닥을 조성하였다. 후면은 성벽에 날개처럼 넓게 붙였는데, 양 옆은 2줄의 할석을 깔아 여장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쪽에서 방형의 계단식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북포루의 구조 중 기단부에서 보축성벽이 보이지 않는 점과 상면의 공간분할 방식 등은 성의 방어용 구조물인 치가 포루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남한산성 등에서 확인되는 조선시대 포루의 고식으로 판단된다. 성 내부에서는 동벽과 서벽 주변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주거지 2기, 구들 23기, 건물지 4기, 저장공 1기 및 축대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장방형주거지와 백제주거지가 1기씩으로, 이중 백제주거지는 한강이 조망되는 구릉의 암반을 파고 수혈식으로 만들어졌다. 바닥과 벽체는 암반층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소토와 목탄흔적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내부에서 할석을 이용하여 연도가 딸린 ‘ㄷ’형태의 부뚜막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승석타날문 호 1개체가 있다. 성내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확인된 유구는 구들로서 총 23기가 확인 되었다. 구들은 방형 혹은 세장방형으로 괴임돌 위에 장방형의 면석을 구들장으로 사용한 구조로 석재로 만든 연도부에 기와 혹은 토기로 보강한 것도 있다. 유구에 따라 고려자기와 조선백자편이 출토되어 축조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4기 중 2기가 2칸 규모의 소형이며, 1기는 규모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 다른 건물지인 나-1호 건물지는 15×5m의 크기로 동문지 안쪽에 위치한다. 건물지의 기단 석렬은 동서로 긴 형태로 북쪽과 서쪽이 남아있다. 북쪽과 서쪽의 기단석렬이 만나는 부분은 둥글게 모를 줄였으며, 주변에 폭 1m로 기와가 산포되어 있었다. 이를 거둬내자 기단석렬의 하부로 거치문이 시문된 적색기와가 드러났는데 이 기와의 일부는 기단석의 하부 기초로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저장공은 구릉의 경사면을 ‘L’자형으로 굴토하여 조성하였다. 크기는 지름 290㎝의 원형이며 내부에서는 갈린 흔적이 있는 석재 1점이 출토되었다. 이상의 유구에서는 토기류와 자기류, 기와류,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는 무문토기와 경질무문토기, 승석타날문토기 등 백제 토기와 삼국시대 단각고배, 통일신라시대 원점문토기와 주름무늬병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구연부의 형태만 보았을 때에는 호로 추정되었으나 문양구성이나 시문방법에 있어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장란형토기로 보았다. 단각고배류는 연질에 투창이 없고 각단이 말려있는 등 매룡리고분 출토품과 비교되어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로 보고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주름무늬병은 어깨의 각도나 주름의 형태로 보아 9세기로 편년할 수 있다. 자기류는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와 조선 중기의 백자가 다량 출토되었으나 분청사기는 소량만이 확인되었다. 주로 생활용기로 대접, 접시, 잔이 다수를 차지한다. 기와류는 선문에 양쪽 분할흔의 방향이 다른 토수기와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기와와 파문이 주류를 이루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다. 철기류는 화살촉과 소도 철정, 호미, 교구 등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중 화살촉은 대부분 유경식으로 촉두의 형태에 따라 유엽형(柳葉形)과 단면삼각형으로 구분된다. 시기편년이 가능한 유물로는 세장방형의 몸에 오각형의 촉두를 갖춘 것으로 6세기 후반 삼국시대 산성에서 자주 수습되는 종류이다. 출토유물로 미루어 볼 때, 파사산성은 청동기시대 고지성 집락으로 사용되다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를 거쳐 조선시대 전시기를 거치면서 성곽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한강 진출과 맞물려 초축되었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발굴결과 백제의 유물이 다수 수습되어 백제의 초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 이후 신라가 이 산성을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사용한 곳임을 감안해 보면 파사성이 신라에 의해 경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선조대에 수축기사가 다수 등장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남북교통과 한강방위의 요충지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오강석) |
참고문헌 | 여주 파사성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기전문화재연구원, 2000∼2003), 여주 파사성 발굴조사 약보-1-(김아관, 한국성곽연구회 정기학술대회 발표요지, 한국성곽연구회, 2003), 여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세종대학교박물관, 2004) |
구분 | 용어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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