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자기 가마의 구조(磁器窯의構造)
설명 자기는 토기 및 기와 등과는 달리 태토와 유약의 원료가 섭씨 1,250도 이상의 온도에서 자화 및 유리질화가 이루어지는 고화도의 원료를 사용한다. 따라서 자기 가마는 가마 내부의 온도를 섭씨 1,250도 이상의 고온까지 올릴 수 있고, 원료가 자화되고 유리질화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고온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로 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가마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연소실과 번조실, 배연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토기 및 기왓가마와 다르지 않다. 다만 가마 내부의 온도를 고온으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연소실에서 가마 전체의 온도를 조절하는 비중이 크다. 따라서 연소실과 번조실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조성하는 특징을 보이며, 측면 출입구를 설치하여 곁불을 넣음으로써 가마 내부의 온도와 불 흐름을 조절하는 기능을 추가한 것이 자기 가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우리나라 자기 가마는 청자(백자)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하는 10세기 전반부터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초기 단계 자기 가마는 크게 두 종류로 대별된다. 하나는 자기를 처음 제작할 당시 중국 웨저우요越州窯의 제작 기술과 함께 도입된 길이가 긴 전축요塼築窯이며, 다른 하나는 원삼국 시대 이후 토기를 제작했던 가마의 전통이 반영된 토축요土築窯이다. 최초의 자기 가마는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벽돌을 이용하여 가마 벽체를 구축한 전축요로부터 시작된다. 황해남도 봉천 봉암리, 배천 원산리 유적을 비롯하여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여주 중암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초기 단계의 전축요는 가마 길이가 4,000cm 내외, 너비가 200〜220cm 정도 되는 대형 가마들로 곁불을 넣었던 측면 출입구가 7〜17개 정도 설치된 구조이다. 이러한 가마 구조는 축요築窯 재료에서 뿐만 아니라 가마의 크기, 고온의 번조 온도와 유지 방법 등 전반에 걸쳐 이전 시기 우리나라 토기 및 기왓가마 등에서는 볼 수 없으며, 중국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웨저우요에서 당대唐代 이후 축조되기 시작하는 전축요와 가마의 규모 및 축요 재료, 구조 등에서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가마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 특히 선해무리굽에 옥연형玉緣形의 기형을 보이는 청자 완을 비롯하여 주자注子, 점권(고리형 받침)과 갑발 등의 요도구는 당唐 말~오吳 대 웨저우요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특히 방산동 유적 출토 유물에 새겨진 ‘오월吳越’, ‘오조吳造’, ‘봉화奉化’ 등의 명문을 통해 우리나라 초기 청자 가마와 웨저우요와의 밀접한 관련성이 확인되었다. 한편, 서리와 중암리 유적 상층의 가마 구조에서는 하층의 전축요와 비교가 되는 토축요가 조사되었는데 이들 토축요는 가마 벽체 일부를 폐갑발 또는 할석, 벽돌 등으로 채우고 진흙을 사용한 것이다. 중암리 유적의 경우 하층 전축요에 비해 토축요의 가마 길이가 2,000cm 정도 소형화되고 있어 전축요에서 토축요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는 가마로 이해되고 있다. 서리 유적에서 조사된 토축요도 진흙과 할석, 갑발 등을 이용하여 벽체를 구축하였으나 가마의 전체 길이가 8,000cm 정도에 달하고 있어 우리나라 토축요 중에서는 가장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다. 출토 유물에서는 한국식 해무리굽 완의 제작 비중이 높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이 처음 가마를 축조할 때는 전축요로 운용하다 후에 개축하는 과정에서 토축요로 바뀌는 사례는 고창 용계리, 진안 도통리 유적 등에서도 조사되는데 고려 초 전축요를 사용하여 청자를 생산하던 초기 단계의 자기 제작 기술이 점차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으로 보인다. 토축요는 진흙이 가마 벽체를 구축하는 데 주재료로 사용되는 가마를 지칭한다. 우리나라 자기 가마는 고려 초기 청자 제작 단계에서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전축요가 축조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축요로 만들어졌다. 초기 청자 제작 단계의 토축요는 강진 용운리 9호·10-1호·63호, 해남 신덕리, 장흥 풍길리 유적 등 주로 남서부 지방에서 확인되는데 가마는 길이가 1,000cm 내외이고, 너비가 120〜220cm 정도인 소형 가마로 조성된다. 연 소실이 지하에 조성되고 굴뚝 부분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로 원삼국 시대로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토기(도기) 가마 구조와 유사한 점이 많다. 가마 벽체는 진흙을 주재료로 축조하지만 연소실과 아궁이 부분은 주로 할석이나 갑발을 쌓아 조성한 것이 많다. 청자 가마 초기 단계의 토축요는 가마 구조 및 축요 재료에서는 전축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만 초기 전축요에서 생산한 해무리굽 청자 완 등을 비롯하여 기형이 유사한 청자도 함께 제작되고 있어 상호 영향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 제작 초기 단계의 가마가 중서부 지방 또는 남서부 지방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는 반면 11세기 후반이 되면 청자 제작지가 각지로 확산된다. 청자 생산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시기의 자기 가마는 길이가 대체로 2,000cm 내외로 조성되고 5~7개의 측면 출입구를 조성한 단실의 토축요이다. 12세기 이후 자기 가마의 연소실은 길이가 100~200cm 내외이고 타원형의 수혈식으로 조성되는데, 연소실과 번조실 사이의 불 턱은 높이가 30〜80cm 내외로 수직에 가깝게 조성된다. 연소실의 벽체는 전면을 할석으로 축조하거나 아궁이 부분만 할석으로 조성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12세기 이후의 청자 가마 구조는 고려 시대 이후 계속 지속되어 조선 전기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까지 전통이 계속 유지된다. 조선 초 분청사기 가마는 보령 용수리·평라리, 세종 송정리, 대전 구완동, 곡성 구성리, 고흥 운대리 유적 등 대체로 고려 시대 토축요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길이가 2,000cm 내외인 단실요가 주로 사용된다. 한편, 15세기 전반의 분청사기 및 백자 가마에서는 이전 시기의 자기 가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단실 불 기둥 가마가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번조실 중간에 진흙 또는 할석으로 불 기둥을 세워 가마 내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불의 흐름을 고르게 분산시키고 단실요 내부의 열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실 불 기둥 가마는 용수리 및 운대리 유적과 같이 15세기 전반에 조성된 유적에서 확인되어 조선 초부터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 전기 분청사기 및 백자 가마에서는 번조실 내부에 불 기둥을 세운 가마가 유행하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불 기둥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는 양상을 보이다가 15세기 중후반 이후로는 2~4개의 불 기둥을 배치하는 양상으로 변화한다. 조선 전기 단실요 및 단실 불 기둥 가마는 기본적으로 연소실, 번조실, 배연부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 단실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번조실 마지막 칸을 초벌 칸으로 별도 운영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초벌 칸은 번조실 마지막 부분을 번조실 바닥면보다 낮게 굴광하고 편평한 바닥면으로 조성한 가마가 있는가 하면, 별도로 굴광하지 않고 번조실 마지막 부분의 바닥면을 편평하게 조성하여 번조실 바닥면과 경사도를 달리한 가마 두 종류가 확인된다. 초벌 칸의 조성 방법이 시기에 따른 축조 방법의 차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 전기 단실요 및 단실 불 기둥 가마는 길이가 1,800~3,100cm 정도로 축조되는데 주로 2,000cm 내외 길이의 가마 사례가 많다. 공주 학봉리 5호 가마의 경우 전체 길이가 4,950cm에 달하고 있어 지금까지 조사된 단실 불 기둥 가마 중 가장 큰 가마에 해당한다. 연소실은 타원형 또는 장방형의 수혈 형태로 조성되며 연소실과 번조실 사이의 불 턱 높이는 40~160cm 정도를 이룬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자기 가마 구조는 이전 시기와는 현저히 다른 구조로 변화하는데, 번조실 중간 중간에 격벽과 불 창 기둥을 설치하여 가마 내부의 긴 번조실을 여러 칸으로 구분하고 각 번조실에서 불의 흐름과 온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분실요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경기도 광주 일원에 설치된 관요官窯 유적 중 선동리(1640~1648년), 송정동(1649~1654년) 유적과 부여 정각리 유적 등 17세기 전반의 백자 가마로부터 분실요의 자기 가마가 사용된다. 분실요 초기 단계에서는 격벽 하부에 4~6개의 불 창 기둥을 설치하였는데, 17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7~13개의 불 창 기둥이 설치되어 번조실 사이의 불 창이 매우 조밀해지고 각 번조실의 불 흐름이 점차 독립적으로 제어될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한다. 19세기 이후가 되면 불 창 기둥이 10~20개 이상으로 매우 촘촘하게 설치되고 각 번조실 천장이 궁륭의 형태를 이루는 연실요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박형순)
참고문헌 한국의 초기청자 연구(이종민,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려시대 청자가마의 구조와 생산방식 고찰(이종민, 한국상고사학보 45, 한국상고사학회, 2004), 한국 도자기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아트, 2005)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생산유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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