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삼형제 초상
- 제작시기
- 18세기 말
- 제작자
- 미상
- 규격
- 화면 42.0×66.5cm
- 지정종목
- 보물
- 지정일
- 2006-12-29
- 소장처
- 국립민속박물관
- 관련사이트
- 조씨삼형제 초상-국립민속박물관 바로가기
해제
〈조씨 삼형제 초상〉은 평양 조씨(平壤趙氏) 승지공파(承旨公派) 문중에 전승되어 온 초상화로서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세 명의 인물을 한 폭에 그린 집단 초상화로서 그 주인공은 조계(趙𡹘, 1740~1813), 조두(趙㞳, 1753~1810), 조강(趙崗, 1755~1811) 삼 형제로 알려졌다. 삼 형제는 영조대(英祖, 재위 1724~1776)에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지낸 조승태(趙升泰, 1716~1777)의 아들들이다. 조계는 갑진년(1784) 무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거쳐 종2품의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이르렀다. 조두는 계묘년(1783) 무과와 병오년(1786) 중시(重試)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종3품 선천부사(宣川府使)에 이르렀다. 조강은 병오년(1786)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해미현감(海美縣監), 삭주부사(朔州府使), 종2품의 광주중군(廣州中軍)에 이르렀다. 이처럼 삼 형제는 모두 무과 급제자로서 부사 이상의 높은 관직에 올라 가문의 명예를 높인 인물들이었다. 초상화 속의 세 사람은 모두 오사모에 분홍 시복을 착용하였다. 안면을 비롯한 회화적인 표현도 거의 유사한 화법으로 묘사되었다. 안면은 필선보다는 음영 위주로 표현되었으며 화면 전면에서 미세한 갈필의 붓질로 명암과 주름을 그려 넣었다. 안면의 측면, 안와 주위, 광대의 아래, 코와 입의 오목한 부분에는 음영을 주어 입체감이 나타나게 하였다. 사모에도 음영을 표현하였으며 사모 양각(兩脚)에는 복잡한 결을 그리는 비단의 간섭무늬인 무아레(moire) 문양을 그렸다. 몸에 착용한 시복은 전체적으로 밝은 분홍색을 도포하고 주름을 따라 음영을 더하였다. 이처럼 세 형제의 의상은 도상과 묘사 방식이 거의 동일하지만 허리의 관대(官帶)와 망건에 부착한 관자(貫子)의 재질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상단의 중앙에 배치된 인물은 학정금대(鶴頂金帶)와 금관자(金貫子)를 착용하여 그의 관직이 종2품임을 알 수 있다. 좌우의 두 인물의 관대는 동일하다. 관대의 띠돈이 갈색의 얼룩 무늬를 그리고 있어 이는 일견 1품 관료의 서대(犀帶)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대는 기본적으로 띠돈에 금속 띠를 두르지 않으며 띠를 두르는 경우에는 금을 사용하였다. 이 초상화에서는 띠돈의 가장자리를 희게 묘사한 점으로 미루어 정3품 관료가 착용하였던 삽은대(鈒銀帶)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관복을 바탕으로 판단하면 학정금대를 착용한 중앙의 인물이 가장 먼저 종2품 관직에 오른 장남 조계로 추정된다. 좌우의 두 인물은 품계가 동일하나 우측 인물이 보다 나이 든 모습을 하고 있어 2남 조두로, 좌측이 3남 조강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에서 〈조씨 삼 형제 초상〉과 같이 한 화면에 여러 인물을 그리는 경우를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다. 일례로 홍필우(洪必遇)가 1803년에 제작한 〈오로도(五老圖)〉는 다섯 노인의 모임을 그린 아집도(雅集圖)이면서 인물만은 초상화적인 묘사 방식을 구사하여 일종의 집단 초상화라 할 수 있는 그림이다. 아울러 승려의 진영(眞影) 중에는 여러 승려들을 한 화면에 그린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의 정식 초상화로서 여러 인물을 동시에 그린 경우로는 〈조씨 삼형제 초상〉 외에는 알려진 사례가 없다. 〈조씨 삼 형제 초상〉의 제작 시기나 화가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전혀 없다. 다만 초상화의 전반적인 화법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특징을 보인다. 조계가 종2품의 경상우병사(慶尙右兵史)에 임명된 시기가 1801년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초상화 역시 이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조씨 삼 형제 초상〉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매우 드문 집단 초상화의 사례로서 조선시대 초상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글: 이경화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