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어진
- 제작시기
- 1900년(광무 4)
- 제작자
- 조석진(趙錫晋), 채용신(蔡龍臣)
- 규격
- 화면 203x83.0cm
- 지정종목
- 보물
- 지정일
- 1987-12-26
-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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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조선 시대 21대 임금인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초상화이다.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며, 제도 개편과 고른 인재 등용을 통해 국정을 안정화하였다. 의례 및 법률을 정비하고 학문을 진흥시키는 등 각 방면에 부흥기를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영조는 거의 10년마다 한 번씩 자신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으며, 다양한 복장을 한 초상을 여러 점 남겼다. 영조의 어진은 경희궁 태령전(太寧殿)을 비롯하여, 육상궁(毓祥宮), 창의궁(彰義宮), 강화도 만녕전(萬寧殿) 등 다양한 장소에 봉안되었다. 긴 재위 기간과 적극적인 어진 제작으로 인해 많은 양의 초상화가 그려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영조 어진은 이 작품 하나이다. 이 초상화는 1744년, 영조의 51세 모습을 그린 것을 1900년(고종 광무4)에 다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는 “영조대왕어진 광무사년경자이모(英祖大王御眞 光武四年庚子移模)”라고 쓴 제첨이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다.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서 화재가 났고, 이로 인해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영조(英祖),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익종(翼宗, 1809~1830),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등 일곱 명의 어진이 소실되었다. 어진들을 새로 봉안하기 위해 다른 곳에 남아있던 초상화들을 가져다가 모사하게 되었다. 그중 제 3실에 있던 영조 어진은 당시 육상궁 냉천전(冷泉殿)에 봉안되었던 본을 옮겨와 조석진(趙錫晋, 1853~1920),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을 비롯한 화사들이 모사하였다. 당시 범본으로 삼았던 육상궁에 있던 초상은 1744년(영조20)에 장경주(張敬周, 1710~?), 김두량(金斗樑, 1696~1763) 등이 그린 것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한 사당으로서 영조는 매일 어머니께 인사를 올리는 마음을 대신하고자 자신의 초상화를 이곳에 걸어 두었었다. 이처럼 <영조 어진>은 자신의 진전에서 제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당에 예를 표하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전신상이 아닌 반신상을 취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영조 어진은 제작 당시 신하들로부터 “칠분을 득한 핍진한 상(실물을 매우 가깝게 묘사한 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초상화 속 영조는 왕이 평상시에 입는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왼쪽을 바라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선 시대 초상화의 특징인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하였다. 배채법은 화면의 뒤에서 채색을 하여 비단 올 사이로 은은하게 채색이 비춰 보이는 효과를 주는 기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안면은 뒤에서 살구빛 채색을 두텁게 한 뒤 앞쪽에서 윤곽선과 음영을 다시 가하였고, 곤룡포는 뒤에서 붉은색으로 칠하고 앞에서 옷의 주름과 음영을 가하였으며, 장식은 뒤에서 금박을 붙이고 앞에서 정교하게 금니로 다시 칠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앞과 뒤에서 모두 채색하는 기법을 통해 깊은 색감과 입체감, 장식성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 <영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영조의 어진으로서 1900년의 이모본이지만 조선 후기의 화풍을 반영하며 본래 봉안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글: 유재빈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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